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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육계, 위위구조와 정치투쟁
 
서상욱 역사가 기사입력  2007/08/13 [23:01]

 

묵계 서상욱님은 해박한 동양의 역사와 주역, 의서에 통달한 분으로 현재 대학교 강사 및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동양 고전과 역사 및 철학에 조예가 깊다.

관자(管子) 제분(制分)에는 이런 말이 있다.
"부자가 되려고 정치를 하는 사람은, 정치를 해도 반드시 부자가 될 수는 없다. 부자가 되는 일을 해야 부자가 될 수 있다. 재력을 이용하여 정치적 강자가 되려고 해도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강자가 되는 방법을 알아야 강자가 될 수 있다. 이기려고 하는 사람은 강하더라도 반드시 이길 수가 없다.

승리의 이치를 알아야 승자가 될 수가 있다. 상대를 제압하고자 하는 사람은 전투에서 이겼다고 반드시 상대를 제압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제압을 하기 위하여 어떻게 상대를 분산시켜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일이든 자세한 연유를 알아야 제대로 처리할 수가 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란 포정( 丁)이 소를 잡을 때, 칼을 다루는 기술 이상의 정보를 알고 있어야 제대로 고기를 바를 수가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칼을 다루는 기술 만으로는 유능한 백정이 될 수가 없다.

정치가로서 관중(管仲)은 제환공(齊桓公)을 보좌하여 패업(覇業)을 이루었고, 제나라가 춘추오패(春秋五覇) 가운데 첫머리를 차지하도록 하였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독특한 안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사물의 연유(緣由)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승리를 거두기 위한 필수적 조건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처럼 위위구조(圍魏救趙)를 사용할 때에는 수많은 정보를 수집, 분석, 판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복잡하고 격렬한 정치투쟁에서, 정적들끼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의 실질적인 정황(情況)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계모(計謀)를 사용할 때는 일정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위위구조의 가장 큰 특징은 사용자가 어느 정도 방관자적 입장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쌍방이 노골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고 있어야,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는 것이 비교적 용이하다.

또한 자연스럽게 ´피실취허(避實就虛)´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비교적 손쉽게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다. 또한 사물은 여러 가지 형태로 변하므로, 변화의 요인을 파악하는 것이 승리에 이르는 필수적인 조건이다. 따라서 이 계를 사용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의 게교(計巧)와 수법이 동반되어야 한다.

첫 번째 수법은 정적을 분산시켜서 세력을 약화시킨 후에 몰아내는 방법이다. 정치투쟁에서는, 통치계급과 피통치계급이라는 두 개의 적대계급을 제외하고도, 여러 가지의 계층들이 각종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통치계급 내부에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과 파벌들끼리 이해관계가 상충되기 때문에, 그들끼리의 정치투쟁이 불가피하다. 정치투쟁에서 단창필바(單槍匹馬)로 나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일정한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정치집단과 파벌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치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격렬한 투쟁은 당연하다. 이러한 혼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정치집단과 파벌은 동맹관계를 맺거나 상호대립을 하게 된다. 바로 이때 위위구조는 승리를 얻기 위한 기회를 탐색하는 유효한 수단이 된다.

전국시대에 위(魏)나라 사람 범수(范睡)는 위왕을 섬기고자 하였으나, 가난하여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고 위의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를 따르게 되었다. 그는 수가가 위소왕(魏昭王)의 사신으로 제나라로 갈 때 함께 갔다. 몇 달이 지났지만 바라던 회답을 듣지 못하던 중, 범수가 언변이 좋다는 소문을 들은 제양왕(齊襄王)이 범수에게 금 10근과 주효(酒肴)를 상으로 내렸다. 그러나 범수는 오해를 받기 싫어서 정중히 사양하려고 했다. 이 말을 듣은 수가는 범수가 위나라의 기밀을 몰래 누설하였기 때문이라고 의심했다. 그는 범수에게 금은 돌려주고 주효는 받으라고 했다.

위나라로 돌아 온 수가는 이 사실을 정승인 위제(魏齊)에게 고발했다. 위제는 몹시 화를 내며 범수에게 매질을 하여 갈비뼈와 치아를 부러뜨렸다. 범수는 거짓으로 죽은 척하여 가마니에 싸여진 채로 뒷간에 버려졌다. 위제는 취객들에게 번갈아 범수의 몸에 오줌을 누게 하여 함부로 망언을 하는 자들을 경계하고자 하였다. 범수는 자기를 지키는 사람을 설득하여 간신히 탈출하고, 이름을 장록(張祿)으로 바꾸었다. 그는 진소왕(秦昭王)의 사지인 왕계(王稽)의 도움을 받아 진나라로 도망갔다.

당시에 진은 소왕(昭王)이 왕위에 있었지만, 태후와 권신(權臣) 위염(魏 )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범수는 외국에서 온 사람이라서 세력기반이 없기 때문에 진나라에서 등용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범수는 먼저 격장계(激將計)로 진소왕의 주의를 끌어서 유세(遊說)를 시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진의 권신들이 범수의 명성을 듣고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과 면담을 하더라도 국내 문제를 함부로 거론할 수가 없었다. 그는 먼저 외국과의 문제를 거론하여 진소왕에게 면담허락을 받았다. 이궁(離宮)에서 소왕을 기다리던 범수는 왕이 왔다는 전갈을 받고도 모른 채 하였다. 시신(侍臣)이 화를 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빈나라에 왕이 어디 있는가? 태후와 양후(穰侯)가 있을 뿐이라고 들었다"

범수의 말을 듣은 소왕은 분노를 감추고 그 동안의 홀대를 사과하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범수는 몇 차례나 사양을 하다가 마침내 진소왕에게 ´원교근공전략(遠交近功戰略)´을 제시하였다. 초(楚), 조(趙)와는 ´원교(遠交)´를, 위(魏), 한(韓)과는 ´근공(近攻)´을, 제(齊)는 고립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 전략은 제나라를 먼저 공격하자는 권신 위염의 전략과 상반된 것이었다. 소왕은 범수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그를 객경(客卿)으로 임명하고 군사에 관한 일을 모의했다.

진나라에 첫 발을 디딘 범수는 원교근공지계를 계획하던 중에 진소왕과 태후와 위염 사이의 모순을 발견했다. 그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궁리를 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범수는 마침내 진소왕을 단독으로 알현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먼저 이간책(離間策)을 써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臣)이 산동(山東)에 있을 때, 제(齊)에는 맹상군(孟嘗君)은 있지만, 왕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진에 와서도 태후와 위염은 있지만, 왕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범수는 진소왕과 태후와 위염 사이에 긴장관계를 조성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다.
"대체로 왕은 나라의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있어야 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권능(權能)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생사를 자기 판단대로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태후는 진의 정치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면서도 왕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위염은 자기 마음대로 다른 나라에 사신을 보내고도 왕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습니다. 화양군(華陽君)과 경양군(涇陽君)은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고 있으며, 고릉군(高陵君)은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왕에게 알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귀족들이 있는 한,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질 리가 없습니다"

범수는 진소왕의 자존심을 자극하고 난 후, 태후를 비롯한 네 명의 귀족들이 정권을 마름대로 휘두르는 한, 진왕은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나라를 잘 다스리는 왕은 안으로 위세(威勢)를 굳게 지키고, 밖으로는 권위(權威)를 무겁게 세워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그리고 제나라의 정치를 마음대로 주무르던 최저(崔杵)가 장공(莊公)의 다리를 활로 쏘았고, 요치가 민왕의 힘줄을 뽑아 대들보에 걸었던 일과, 조나라의 권신 이태(李兌)가 무령왕(武靈王)을 사구(沙丘)에 가두어 백일만에 굶어서 죽게 했던 일을 말했다. 그리고 위염을 비롯한 네 명의 귀족들도 결국은 이런 무리들과 다름이 없다고 말하여 진소왕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또 하(夏), 은(殷), 주(周) 삼대가 망했던 원인은, 임금이 신하에게 정치를 맡겨두고, 자기는 술이나 마시고 사냥을 즐겻던 탓이었다고 겁을 주었다. 범수의 설득은 진소왕이 정치적 결심을 굳히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지금 유질(有秩) 즉 향관급(鄕官級) 이상의 대관(大官)에서, 왕의 측근에 있는 자들에 이르기까지, 위염의 사람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조정에서 왕께서는 고립되어 있습니다. 신이 남몰래 걱정하는 것은, 왕께서 마침내 이들에게 해를 당하여, 얼마 후에 진을 다스리는 자가 왕의 자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입니다"

유창한 범수의 변설에 마침내 마음이 움직인 소왕은 태후를 폐하고 네 명의 귀족들을 몰아냈다. 범수는 진소왕의 손을 빌려서, 자기에게 불리한 정치세력을 몰아내고, 승상의 지위를 차지했으며, 제후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사기(史記) 범수채택열전(范睡·蔡澤列傳)》

범수는 이렇게 하여 통치계급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는 먼저 위염의 "원공근교(遠攻近交)"라는 군사전략상의 모순을 설득하면서, 태후와 위염이 진소왕과 대립하던 권력투쟁 사이로 파고들었다. 군사적 문제가 위염 등에게는 실제적으로 그리 큰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범수를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범수의 목적은 점차적으로 진소왕에게 신임을 얻어서 자기 세력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때가 무르익자 범수는 위염 등의 약점을 자세히 파악하여, 진소왕의 힘을 빌려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다.

사마광(司馬光)은 이러한 범수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위염은 진소왕을 옹립했지만, 오히려 해를 입을까 두려워 한 소왕에게 제거되었다. 위염은 백기(白起)를 장군으로 삼아, 남으로 언( )과 영( )을 취하고 동으로는 제를 쳐서 넓은 땅을 빼앗았다.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봉사하도록 하여 진을 더욱 강대국으로 만든 것은 모두 그의 공이다.

비록 방종(放恣)하고 탐욕스러워 수가에게 속았지만, 범수의 말처럼 그렇게 지나친 것은 아니었다. 범수는 진정으로 진을 위하여 충성스러운 계모를 바친 것이 아니라, 위염의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려고 하여 그를 몰아냈던 것이다. 그는 진소왕 모자지간의 의(義)를 끊게 하였고, 외삼촌과 조카 사이의 은혜를 저버리게 하였다. 범수야말로 삐뚤어지고 위태로운 선비가 아니었는가?"

사마천(司馬遷)은 비난도 칭찬도 아닌 부러움과 질투로 다음과 같이 토로(吐露)하였다.
"한비자(韓非子)는 ´소매가 길어야 춤을 찰 추고, 밑천이 많아야 장사를 잘 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범수는 세상에서 말하는 일류 유세가였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은 유세가라도, 백발이 되도록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해, 뜻을 펼치지 못한 경우도 많다. 그것은 그들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유세의 대상이 된 나라의 국력이 약해서였다. 범수가 국경을 넘어 진라로 가서 객경이 되었던 것은 이미 진이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

사마광이 무슨 말을 했던지 막론하고, 범수는 정치투쟁에서의 승리자이다. 범수는 또 다른 유세가 채택(蔡澤)이 그의 자리를 노릴 때까지, 10여년 동안이나 재상(宰相)을 지냈다. 그는 먼저 채택을 인정하지 않고 괴이하다고 질책하였다. 그러나 채택이 "태양은 중천에 떠오르면 머지않아 서녘으로 옮겨가고, 달도 차면 기운다고 합니다.

그대는 이미 큰 공로를 세웠고 원한도 갚았으니 또 무엇을 더 이루고자 합니까?
신명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이 가장 윗길이고, 법을 지키느라고 몸이 죽게된 사람이 다음이며, 이름을 욕되게 하고 몸을 지키는 사람이 가장 아랫길입니다"라는 충고를 하자, 채택을 재상으로 추천하고 자신은 병을 빙자하여 깨끗이 물러났다.

이런 사실을 보면, 비록 범수가 사마광에게 비난을 받았지만, 정치투쟁 중에서 온전한 판단력을 잃지 않았으니, 높은 식견과 지혜를 지닌 ´뒤가 깨끗한 사람´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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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8/13 [23:01]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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