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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위구조와 피실취허(避實取虛)
삼십육계 제2계
 
서상욱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07/09/17 [20:25]

 

묵계 서상욱님은 해박한 동양의 역사와 주역, 의서에 통달한 분으로 현재 대학교 강사 및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동양 고전과 역사 및 철학에 조예가 깊다.

삼국시대에 제갈량(諸葛亮)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천하삼분론(天下三分論)’이라는 전략적 대안을 유비에게 설명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을 ‘융중대(隆中對)’라 한다. 요점은 유비는 가장 장자인 조조(曹操)에게 대항하기 위해 오(吳)와 연합해야 하며, 일시에 천하를 통일하지는 못하므로 삼국정립을 통해 세력을 다진 후에 기회를 노렸다가, 나중에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면 한왕실을 부흥하는 기치를 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전략에 따라 유비(劉備)는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를 크게 무너뜨린 후에 형주(荊州)를 차지하였고, 나중에 다시 익주(益州)까지 점령하여 촉한(蜀漢)을 건국했다. 삼국정립의 한 축을 차지한 것이다. 오와 촉은 서로 연합하면 조조를 견제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서로 분리되면 국력이 조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삼국정립은 오와 촉으로서는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변화했다.

AD 219년 촉의 대장 관우(關羽)는 유비가 한중(漢中)을 탈취하여 위나라의 서북방을 압박하자 공명심이 발동했다. 그는 오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曹操위나라의 동남방을 공격하기로 했다. 관우는 강릉(江陵)에서 북쪽으로 진군하고, 손권은 합비(合肥)를 공격했다.

관우는 번성(樊城)에서 조인(曹仁)의 부하 우금(于禁) 등 칠군(七軍)을 수장(水葬)시켰다. 번성이 포위되자 화하(華夏)가 진동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조조는 적의 예봉을 피하여 본거지를 옮길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자 조조의 군사(軍師) 사마의(司馬懿)가 계책을 세워 다음과 말했다.


“우금의 부대가 수몰(水沒)되었지만 국가의 대계(大計)를 그르칠 만큼의 손실을 입은 것은 아닙니다. 유비와 손권은 겉으로는 친하지만 속은 딴판입니다. 관우가 뜻을 이루는 것을 손권은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사람을 손권에게 보내어 강남(江南)을 떼어주겠다고 하면 저절로 번성의 포위가 풀릴 것입니다”

사마의는 적을 분산시켜서 세력을 약화시킨 후에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조는 그의 의견을 채택했다.

조조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손권은 이익을 주겠다는 유혹에 넘어갔다. 그는 얼마 전에 관우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다가 관우로부터 모욕을 당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적벽대전의 승리는 실질적으로 오나라가 전국력을 기울여 싸운 결과였지만, 가장 중요한 전리품인 형주는 유비가 차지하고 말았던 것에 내심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는 관우를 공격하여 형주를 차지하겠다고 생각했다. 조조의 사신이 오자 손권은 조조에게 글을 보내어 자신이 관우를 토벌하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손권을 우방으로 생각한 관우는 특별한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조조의 모사 동소(董昭)는 손권의 배신을 폭로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그는 두 적을 동시에 상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므로 관우도 손권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면 번성에서 후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참모는 관우는 강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번성에서 대공을 세우고자 절대 물러 날 사람이 아니라는 점과 조조군에 퇴각하는 것을 알면 오히려 사기가 높아질 것이라고 하였다. 과연 동소의 견해와 달리 관우는 철수를 하지 않았고, 오군의 기습을 받은 형주는 함락되었다. 관우는 앞뒤로 적을 맞이하여 맥성(麥城)으로 패주했다가 손권에게 잡혀서 죽었다.

조조는 유비와 손권의 모순관계를 이용하여, 이(利)로서 손권을 유혹하여 쌍방의 연맹을 깨뜨렸다. 촉은 이로서 큰 손실을 입었고 점차 국력을 잃어갔다. 그러나 손권도 별다른 이득을 얻지 못했다. 비록 형주를 얻었고, 촉과의 이릉대전(夷陵大戰)에서 무려 7백리에 이어진 영채(營寨)를 불태우는 완승을 거두었지만 다시는 북상하여 천하를 노릴 기회를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 조조는 유비와 손권의 연맹을 깨뜨려 점차적으로 우세를 차지하기 시작하였고, 이 후로 촉과 오가 다시 연맹을 하였지만 이미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 하나의 모략이 삼국의 대치상황을 무너뜨리고 위를 가장 강대한 나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2. 피실취허(避實就虛)

정치투쟁 중에서 각종 정치세력은 자기의 유리한 입장에 따라, 때로는 연합하고 때로는 공격하며 때로는 평화적 공존을 한다. 어떤 상태를 선택하든 궁극적으로는 정치투쟁의 전략이다. ‘피실취허’는 정치투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중요한 책략이며 승리를 얻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상대의 강점을 피하고 약점을 골라서 공격하는 것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구현하느냐가 모든 싸움에서 승리를 얻기 위한 기반이 된다.


한고조 유방(劉邦)의 황후 여씨(呂氏)는 강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에 정권을 장악하여 실질적으로 한왕조의 2대 황제나 다름이 없는 지배자가 되었다. 그녀가 정권을 잡았던 10년 동안 유씨 성을 가진 제후와 왕들의 세력이 강대해졌고, 공신집단은 여전히 정권의 버팀목이 되었다. 종실과 공신들은 여후와 밀약을 맺고, 질투에 눈이 멀었던 그녀가 참혹하게 척부인(戚夫人)을 죽이고 흉악하고 잔인한 수법으로 공신들을 제거하였으며,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를 독살하고 유씨 종실의 세력을 점차적으로 제거하는 것까지 묵인했다.

그러나 여후는 여전히 마음이 불안하여 침식이 편하지 않았다. 여후의 마음속에는 여씨 일족을 중용하여 종실과 공신들의 세력에 대항하는 힘을 길러서 자기의 통치기반을 확고하게 다지고 싶었다.

AD 180년 여후는 병이 깊어지자, 스스로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여씨 가문의 흥망이 위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조카 여록(呂祿)을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하여 북군(北軍)을 관장하게 하였고, 여산(呂産)을 상국(相國)으로 삼아 정무(政務)를 총괄하게 하는 한편, 남군(南軍)을 장악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여씨로서 왕이 된 사람들에 대한 대신들의 평가가 좋지 않다. 내가 죽으면, 황제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대신들이 변란을 일으킬까 두렵다. 반드시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지켜야 한다. 나의 장례식을 치른다고 궁궐을 비우지 말아야 한다. 공신들은 노련한 사람들이다. 자칫하다가는 순식간에 제압당할 것이다.”

여후는 공신집단과 유씨 종친들이 비밀리에 연합하여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미리 철저히 대비하지 않으면 장차 여씨가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강한 성품을 지녔지만, 대단한 정치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과연 여후가 죽고 난 후, 유씨 성을 가진 왕인 제왕(齊王)과 초왕(楚王)이 여씨를 제거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군사를 일으켰다. 공신 주발(周勃)과 진평(陳平) 등도 여러 유씨 왕들과 모의하여 여씨를 안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여록과 여산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기가 죽어 있던 제후와 공신들은 자기들의 세력만으로 여씨를 당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때 일생을 음모(陰謀)로 살았다는 평을 받은 진평(陳平)이 승리의 관건이 될 하나의 계모를 제시하였다. 그것이 위위구조지계 중에서 ‘피실취허’라는 수단이었다.

진평과 주발은 먼저 역상(酈商)을 잡아 여록과 친한 그의 아들 역기(酈寄)를 위협하고, 여록을 속여 이렇게 말하도록 하였다.

“고제와 여후는 함께 천하를 평정하여 유씨를 아홉 왕에, 여씨를 세 왕에 봉했습니다. 이것은 대신들도 합의한 것으로 이미 제후들에게 통고되었으며, 제후들도 당연히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태후께서 돌아가시고 황제는 아직 나이가 어린데, 그대는 조왕의 인수를 차고서 위급한 봉지를 지키려고 하지는 않고, 상장군의 신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장안(長安)에 주둔하고 있으니, 대신들과 제후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겠습니까?

상장군의 인수(印綬)를 반환하고 병권을 태위(太尉) 주발(周勃)에게 넘기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양왕(梁王-呂産)께서도 상국(相國)의 인수를 반환하시고 대신들과 맹약을 맺은 후에 봉국(封國)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면 제왕(齊王) 유양(劉襄)도 명분이 없어서 물러날 것이며 대신들도 안심을 할 것입니다. 사방 천리나 되는 조나라 땅의 왕으로서 편안하게 지내시는 것이 만세에 이로운 일일 것입니다”

여록은 마음이 움직였지만 다른 여씨들은 결심을 내리지 못했다.

공신집단과 제후들이 여씨를 내몰려고 하자, 여씨도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왔다. 쌍방이 화살을 겨눌 위기에 처하자, 력기가 다시 여록에게 군권을 반환하라고 재촉했다. 여록이 망설이는 틈을 이용하여 설득하여 북군으로 들어 간 주발은 북군의 지휘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아직도 남군은 여씨가 장악하고 있었다. 교전이 벌어지면 어느 쪽이 이길지 모르는 판세였다.

한대의 경성(京城)과 황궁(皇宮)에 대한 수비는 중앙집중적인 직속군(直屬軍)으로서 4개 부대로 구성되었다. 그 중 하나는 궁궐 안의 경비를 담당하는 낭관(郎官)들로서 낭중령(郎中令)의 통솔을 받았으므로 낭위(郎衛)라고 불렀다. 낭관은 의랑(議郞), 중랑(中郞), 시랑(侍郞), 외랑(外郞)으로 구분되었고 그들의 임무는 주로 숙위(宿衛)를 하며 황제의 명령에 따르거나 자문(諮問) 역할이어서 별다른 실권이 없었다.

다른 하나는 외궁(外宮)의 경비를 맡은 위사(衛士)들로 위위(衛尉)의 통솔을 받았다. 위사의 지휘기관은 장안성(長安城) 안에 있는 미앙궁(未央宮)에 주둔하였고, 미앙궁이 장안성의 남쪽에 있었으므로 ‘남군’이라 불렀다. 남군은 초기에 약 2만 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지만 한무제가 반으로 줄여 나중에는 1만 명이 되었다. 병사들은 각 군국에서 번갈아 차출하였다. 위위의 아래에는 남궁위사령(南宮衛士令)과 북궁위사령(北宮衛士令)이 있어서 각각 남궁과 북궁의 위사들을 관장하였다.

위사령은 좌우도후(左右都候)를 두어 궁중 안을 순찰하였고, 궁액문(宮掖門)에는 사마(司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이들은 궁 안에 주둔하고 있는 위사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말을 관리하였으며 궁문을 지키는 위사들을 관장하였다. 또 공거사마령(公車司馬令)이라는 직책이 있었는데 각종 문서와 공헌물(貢獻物)을 수발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경성을 지키는 둔병(屯兵)으로 초기에는 중위(中尉)의 지휘를 받았다. 이들은 주로 장안성 북쪽에 주둔하였으므로 북군이라고 불렀다. 한무제가 북군을 개혁하여 팔교위(八校尉)를 설치하고 각 교위마다 8백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평소에는 경사의 수비를 맡고 있다가 전쟁이 나면 황제가 임명한 장군을 따라 전원 전쟁에 참가하였다.

마지막 하나는 경사의 안과 밖을 수비하는 위수군(衛戊軍)이다. 한무제가 집금오(執金吾)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였던 일종의 기마순찰대(騎馬巡察隊)로서 장안성 안에 주둔하였다. 성문교위는 성문에 주둔하는 수비병을 이끌었고, 장안성의 좌, 우, 경보도위(京輔都尉) 세 명의 지휘관을 부하로 두고 장안성 외곽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 부대는 집금오의 통제를 받는 독립부대로서 장안에 주둔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여산이 2만명에 이르는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더구나 황제를 끼고 있었으므로, 만약 주발이 거병을 한다고 해도 호각(互角)을 이룰 수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위세를 끼고 나오면 승리를 거두기가 어려웠다. 여산은 미앙궁에 주둔하여 군대의 발동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공신과 종실이 병변을 일으킨다고 해도 이긴다는 확신이 없었다.

진평과 주발은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여록이 병권을 포기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동시에 남군이 주둔하고 있던 미앙궁을 지키는 위위에게 여산을 궁전 문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하고, 주허후(朱虛侯)에게 1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미앙궁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여록이 북군을 떠났다는 소식을 미처 듣지 못한 여산은 미앙궁으로 들어가 난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위를 배회하였다. 이 때 유장(劉章)이 이끄는 북군이 오자 여산은 여록이 자기를 구원하러 온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러나 북군은 여산의 기대처럼 원군이 아니라 이미 적군으로 변했다. 여산은 급히 도망쳤으나 낭중령 관부의 측간에서 피살되었다. 여산이 죽자 주발은 여씨 남녀를 체포하고 노소를 막론하고 몰살시켰다. 이어서 병권을 반환하고 도망친 여록을 추격하여 죽이고, 여후의 여동생으로 개국공신 번쾌(樊噲)의 아내였던 여수(呂嬃)를 대나무 채찍으로 때려서 죽였다. 이로서 여씨의 정권은 막을 내렸다.


이상의 사건을 종합해 보면, 진평과 주발가 두 차례나 ‘피실취허’ 수법을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여록이 병권을 휘둘러 유능하고 전투력이 높은 북군을 거느리고 나오게 되는 ‘실’을 피하고, 여록에게 위험보다는 이익이 보장되는 안전한 길을 생각하는 ‘허’가 있다는 점을 노려 집중적으로 설득하여 북군을 장악하여 불리한 국면을 유리하게 바꾸었다.

둘째는 여산의 미앙궁 진입을 막아서 여산이 가진 ‘실’을 피하고, 그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허’를 노려서 기습공격을 하여 최종적인 승리를 얻었다. 이것은 흉험한 입장을 피하고 자신의 장점으로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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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9/17 [20:25]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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