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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 1곡으로 양주자사가 되다
<강경범의 음주고사>후한서 환자열전의 맹타(孟佗)편
 
강경범 문화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09/09/20 [05:21]
역사를 돌이켜보면, 나라가 망할 때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는 당시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기에 느끼는 소감일 것이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음을 깨닫고서 자신을 다시금 돌이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역사서가 주는 커다란 장점일 것이다.

중국에서 진(秦)나라를 이어 들어선 한(漢) 왕조가 영원히 갈 것 같았지만, 내시들의 농락으로 인해 멸망의 길로 들어설 지 어떻게 알았을까? ≪삼국지≫를 통해 우리는 한말 십상시(十常侍)가 정권을 농단하고 온갖 탐욕을 일삼은 행위에 치를 떨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고사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후한서(後漢書)≫권78 ≪환자열전(宦者列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부풍 사람 맹타는 재산이 많았으며, 장양(張讓)의 종과 친구가 되어, 자주 찾아 선물을 하며 안부를 묻는데 아낌이 없었다. 종들은 모두 그가 덕이 있다고 여겨서 맹타에게 ‘그대는 무얼 원하시오? 힘써 처리해보리다.’라고 물었다.

맹타가 ‘저는 당신들이 나를 위해 절을 한번 해주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빈객이 장양을 만나기를 원하는 수레가 항상 수천 대가 되었는데, 맹타는 그때 장양을 만나기 바랐지만 뒤에 왔기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노비 감독관이 여러 노비를 이끌고 길에서 맹타에게 절을 하고, 마침내 모든 수레가 문안으로 들어갔다. 빈객이 모두 놀라, 맹타가 장양과 아주 친하다고 여겨서, 진귀한 물건을 그에게 선물하였다. 맹타는 이것을 나누어 장양에게 선물하니, 장양이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맹타를 양주자사로 삼았다.”

당시 십상시의 우두머리인 장양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집의 하인조차 친하게 지내려고 했으며, 그 하인이 인사하는 사람은 장양과 당연히 친하다고 여기게 되었을까? 하기야 환제(桓帝)가 “장상시(張常侍: 즉 張讓)는 나의 아버지, 조상시(趙常侍: 즉 趙忠)는 나의 어머니다”라고 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말할까? 영제(靈帝) 때는 이들을 열후(列侯)에 봉하게 되니 정권을 농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하수상하니, 출신조차 전혀 알지 못하는 자에게 뇌물을 받고서 자사자리를 선듯 내주는 왕조에서 무얼 더 기대하겠는가? 오직 혼란과 멸망의 길 밖에는...
이 시점에서 조금 냉정하게 다시 맹타의 처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맹타는 아주 영리했던 모양이다. 얼굴조차 보기 힘든 장양을 쉽게 만날 수 있는 묘안을 고안한 것이나 그에게서 관직을 매수한 것이나 그는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러분은 맹타가 뇌물로 자사자리를 얻은 것이 부러운가? 한말의 역사를 읽으며 십상시의 행위에 분개하면서 또한 양주자사에 오른 맹타가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라고 치부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친일파의 명단이 쉼없이 거론되고 거론되는 것을 보시길...송대 소동파도 이에 대해 “장군은 백번을 싸워도 제후에 봉해지지 못했는데, 맹타는 1곡(斛)으로 양주를 얻었다.”고 이를 조롱하였다.

이 고사는 또한 중국의 포도주 전래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
포도의 전래는 서한(西漢) 무제(武帝)(기원전140년~서기87년) 때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을 개척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중국 본토에서 포도주 제조가 언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설이 없는 듯 하다.



그런데 위 인용문의 주(注)에서 ≪삼보결록주(三輔決錄注)≫의 “맹타는 자가 백랑(伯郞)인데, 포도주 1두(斗)를 장양에게 보냈고, 장양은 곧 맹타를 양주자사로 삼았다.”고 한 것을 인용하였다. 위 인용문에서는 맹타가 선물한 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여기서 맹타가 선물한 것이 바로 포도주라고 밝힘으로 인해 다른 책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적고 있다.

≪도서집성(圖書集成)․식화전(食貨典)≫권273 <주부(酒部)>: “한말의 정권이 환관에게 있었다. 서양주(西凉州) 포도주 10곡을 장양에게 준 자가 곧 양주자사가 되었다.(漢末政在閹宦. 有獻西凉州葡萄十斛於張讓者, 立拜凉州刺史.)”
≪예문유취(藝文類聚≫권87 ≪속한서(續漢書)≫: “≪돈황장씨가전(敦煌張氏家傳)≫에서 이르기를, ‘부풍 사람 맹타가 포도주 1승(升)을 장양에게 주고, 양주자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삼국지,위지(魏志),명제기(明帝紀)≫에: “그(즉 佗)는 또 포도주 1곡(斛)을 장양에게 보내어 곧 양주자사가 되었다.”



이 기록들은 포도주를 선물한 양에 있어서는 10곡(斛), 1승(升), 1곡(斛) 등 약간 차이가 나지만 포도주를 선물한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주전(酒顚)≫에서 “맹타는 창포주(菖蒲酒) 1곡(斛)을 장양에게 보내고 곧 양주자사가 되었다.(孟佗以菖蒲酒一斛遺張讓, 卽拜凉州刺史.)”고 한 기록이 있지만, 양주(지금의 감숙(甘肅)성 무위(武威))는 서역의 이민족인 오손(烏孫)이 있던 곳이고 비단길로 통하는 곳이라는 점과 귀한 물품을 선물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창포주보다는 포도주를 보낸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듯 하다.

문제는 그 포도주가 수입산인가? 중국산인가?하는 점이다. 중국의 포도주 양조법은 당(唐) 태종(太宗) 때에 와서야 기록이 보이는 점으로 봐서 이때는 아마 수입 포도주라고 봐야 할 듯 하다.

≪예문유취(藝文類聚)≫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서역의 포도주는) 이전에 공물로 바쳐졌지만 사람들이 모두 모른다. (이정(李靖)장군이) 고창국(高昌國)을 함락하고 마유포도(馬乳葡萄)의 열매를 얻어서 궁중의 후원에 심고 제조법을 얻었다. 황제가 친히 양을 줄이고 더하여서 술을 만들었는데, 무릇 8색을 띠는데, 어둡고 붉은 동이에 향기와 신맛이 진했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주어서 경성에서 비로소 그 맛을 알게 되었다.”

당 태종이 고창국을 정복한 것은 640년이었으니, 이때부터 포도주 양조법이 전해졌다고 봐야하겠다. 그러나 이후에 양조법에 관한 기록이 없고, 다만 왕적(王績)․이백․최호(崔顥) 등의 시에 포도주가 등장한다. 그런데 당대 여러 싯구를 참고로 하면, 아마도 호인(胡人)이 운영하는 술집에서 그들의 춤과 더불어 포도주를 즐긴 것이라 짐작된다.



그런데 그 호인의 술집에서 판 포도주가 처음에는 수입산일 터이지만 나중에는 직접 포도주를 제조하여 팔았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중국의 술이 당대 중기 이후에서 송대에 걸쳐 크게 발전한 것을 참고로 하면, 포도주 또한 발전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은데, 금(金)대 원호문(元好問)의 <포도주부(葡萄酒賦)>의 서문(序文)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주의 유광보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 안읍(安邑)은 포도가 많지만 포도주의 제조법을 모른다. 어렸을 적에 일찍이 친구 허중상(許仲祥)이 그 열매를 따서 쌀과 함께 끓였다. 술을 빚어 비록 만들었으나 고인이 말했던 달지만 엿처럼 달지 않고 서늘하지만 차지 않다고 한 특징을 이미 잃었다.

정우(貞佑) 연간(1213년~1216년)에 이웃에 사는 집이 도적을 피하여 산에서 돌아왔는데, 텅 빈 동이 속에 넣어 둔 포도를 대그릇에 꺼내놓았는데 줄기와 꼬타리가 말랐고, 동이 속에 즙이 고여 술냄새가 나는 것을 봤다. 이것을 마시니 좋은 술이었다. 오래되어도 부패하지 않고 자연히 술이 된 것일 뿐이다.

전해지지 않았던 비결이 하루아침에 발견하니, 문사들이 대부분 이를 좇았는데, 지금 자네에게 전하니, 자네는 정녕 생각이 있는가?” 내가 말했다. “세상에 이러한 술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나 역시 일찍이 서역에서 온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대식인(大食人)은 포도를 장처럼 담가서 봉하여 이를 땅에 묻으면 얼마되지 않아 술이 되는데, 오래될수록 더욱 좋아서 천 곡(斛)을 저장한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이 바로 이와 맞다. 사물은 차이가 없지만 때에 따라 드러나거나 묻혀버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저 이것을 수백 년 뒤에도 얻고, 수만리나 떨어진 곳에 알려지도록 글을 짓는 것이 좋다.”

이글은 포도주 양조법으로써 보면, 믿을 만 하다. 인용문에서 쌀과 함께 끓였다고 하는 것은 즉 제대로 된 양조법을 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전통적인 막걸리나 소주를 만드는 법을 도입한 것이니, 수입 포도주의 맛이 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용기속에서 포도로만 자연숙성된 맛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포도 제조법인 것이다.

방법을 알게 되면 간단하고 쉬운 것인데도 이토록 오랜 시일이 걸리는 것이 문화이며, 이것이 곧 묘방인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러한 묘방을 쉽게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오랜 시일을 통해 터득한 그러한 기능을 쉽게 전수하지 않았던 것은 곧 장인(匠人)의 밥줄이기 때문이다.

남송시기 주밀(周密)의 <계신잡식(癸辛雜食)>에서 “회회국(回回國)의 포도주는 다만 포도만으로 술을 빚는데, 처음에는 다른 것을 섞지 않는다.”고 한 것을 볼 때, 남송시기에도 이러한 방법을 전혀 모른 것은 아닐 터지만, 이것이 일반화된 것은 아마도 술과 안주의 관계를 고려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금(金)나라는 유목민으로써 그들이 먹는 음식이 아마 포도주와 맞아 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원(元)대에 이르러 포도주가 크게 발전하게 되는데, 원나라 또한 유목민으로써 동서양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탓도 있을 것이다. ≪원사(元史),세조본기(世祖本紀)≫에 의하면, 지원(至元28년(1291년) 5월에 “궁성 속에 포도주실과 여공실을 건설하였다.(宮城中建葡萄酒室及女工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보면 북경에도 포도주를 양조하는 곳이 생겼으니, 중국의 포도주 양조기술이 전체적으로 퍼지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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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9/20 [05:21]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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