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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환골주를 하사하다
<강경범의 음주고사>원화중흥(元和中興)의 배도(裵度)
 
강경범 문화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09/11/08 [18:17]

배도(裵度:765년~839년)는 안사의 난 이후 번진이 발호하고, 환관이 세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점점 쇠락해져가는 시기에, 잠시 헌종(憲宗)의 ‘원화중흥(元和中興)’을 도운 공로가 있어서 당대 사서에서 현명한 재상으로 일컬어진다.

특히 그는 암살당한 무원형(武元衡)을 대신하여 재상에 임명된 뒤에 회서(淮西)절도사 오원제(吳元濟)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국공(晋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이후 헌종,목종(穆宗),경종(敬宗),문종(文宗) 등 4왕조에 걸쳐 고관을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번진의 세력을 잠재우고 다시 한번 당의 중흥을 도모하려는 헌종과 의기투합하여, 절도사를 억압하고 환관에 대해 강경책을 취했기에, 반대 세력에게 신변의 위협과 모함을 받아야 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앞의 백거이편에서 언급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치청(淄靑)절도사 이사도(李師道)가 회서의 난 때 오원제를 도와서 재상 무원형을 암살하고, 어사중승인 배도에게 상해를 입힌 사건이 그것이다.

재상까지 암살당할 만큼 혼란하던 시기에 그가 4왕조에서 고관을 지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중국인들이 익히 아는 ‘배도가 허리띠를 돌려주다(裵度還帶)’라는 고사를 잠시 소개한다.



배도는 25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는데, 과거시험 준비를 할 무렵의 이야기다. 그는 생활이 빈궁하여 항상 남루한 옷을 입었고, 밥을 굶어서 안색도 푸르팅팅 생기가 없었다. 인근의 관상쟁이 손추학(孫秋壑)이 “너는 관상이 기이하여, 만약 관리가 되지 못한다면 굶어죽을 것이다.”고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느날 배도가 공부를 하다가 심심하여 책 한권을 들고 향산사(香山寺)로 놀러갔다. 절과 불상을 구경하고, 불상에 절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데, 온갖 고생을 겪은 듯한 한 부인이 보따리를 들고 불전 앞으로 들어왔다.

배도는 그 부인은 그 보따리를 불상 옆에 두고,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하고 입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방해가 될까봐 불전을 나와서, 한참을 불전을 돌면서 책을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불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보따리가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보따리를 들고 그 부인을 찾았지만 이미 찾을 수가 없었다.

배도는 혹 누가 그 보따리를 가져갈까봐서 그 보따리를 들고 불전 앞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그 부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 호기심으로 보따리를 열어보니, 그속에는 옥으로 된 두 개의 띠가 있었다. 그는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결국 돌아왔다.


다음날 일찍 절로 가서 그 부인을 기다렸다. 한참을 지나니 그 부인이 허둥지둥 울면서 보따리를 찾으러 왔다. 그 부인의 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모함에 빠져 옥에 갇혀서 얼마 후에 사형당할 것이었다. 그래서 부인은 두 개의 옥대를 빌려서 경성으로 와서 요직에 바치고 아버지를 구하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그 부인은 보따리를 돌려받고서, 물소뿔 띠를 꺼내어 그에게 주었지만 그는 결코 받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매우 빠르게 전해졌다. 관상쟁이 손추학이 배도를 보고서, “당신은 음덕을 쌓았으니, 반드시 삼공(三公)에 오를 것이오.”라고 하였다고 한다.

≪주전(酒顚)≫에 의하면, 헌종이 ‘환골료(換骨醪)을 하사하다’는 항목이 있는데, “헌종은 일찍이 봉이화(鳳李花)를 구해서 환골료를 담았다. 진공(晋公) 배도가 회서(淮西)를 평정하고 돌아오니, 황제가 누런 천으로 포장한 금병(金甁) 두 말을 하사하였다.”고 하였다.

잠시나마 원화의 부흥을 일으켰던 헌종이 말년에 궁을 개축하고 호화로운 향락에 빠지고, 장생불사약을 복용하는 등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가 환관 진홍지(陳弘志)에게 해를 당하고, 당왕조는 몰락으로 접어드는데, 위 인용문에서 헌종이 장생불사를 추구한 일면을 찾아볼 수가 있다.

헌종은 장생불사를 위해 용고주(龍膏酒)와 환골료(換骨醪)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이 용고주는 지금의 이란 부근의 오익산리국(烏弋山離國)에서 진상한 술로써, 색깔이 옻처럼 검은데, 이 술을 마신 뒤에는 정신이 상쾌하여 신선이 되는 듯 하다고 한다. 환골주는 재료와 제조법은 알 수 없지만 이것을 마시면 심취하게 만든다고 한다. 헌종은 이것을 술 중의 상품으로 여겨서 금병에 넣어 보관했다고 한다.

필자가 짐작하건대, 중국어의 봉리(鳳梨)가 파인애플인데, 봉리(鳳李)는 봉리와 함께 읽힐 수 있기에 혹 ‘파인애플주’가 아닌가 여겨진다.
어쨌든 위 인용문을 보면, 헌종이 무척 아끼던 술을 배도에게 하사했다는 것은 그가 헌종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는 것과 헌종이 번진세력을 평정하는데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또한 ≪주전≫에 의하면, “진공 배도는 집을 짓고서 어진 이를 모았는데, 백거이,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술을 마시고 즐기면서도 인간사에 대해서는 묻지를 않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부연하자면, ≪구당서(舊唐書)․배도전≫에 의하면, 배도는 말년에 “동도인 낙양의 집현리(集賢里) 우교(牛橋)에 집을 짓고, 산과 연못을 꾸미고 대나무와 나무를 심었다. 정자와 수각 등을 세워서 도성에서 아주 뛰어났는데, ‘녹야당(綠野堂)’이라 이름을 짓고, 일을 돌보는 여가에, 백거이․유우석 등과 종일토록 술을 마시며 시를 지으며 즐겼다고 한다.

그가 백거이,유우석 등과 어울린 점이 주목된다. 이들은 중당시기 개혁의 의지를 가진 문인이자 정치가였으며, 백거이는 물론이거니와 유우석도 왕숙문(王叔文)을 우두머리로 하는 ‘영정(永貞)혁신’에 참가하여 낭주(郎州)사마로 폄적을 당했다. 배도는 재상에 있던 20여년간 이덕유(李德裕),이종민(李宗閔),한유(韓愈) 등의 명사를 추천하였고, 이광안(李光顔),이삭(李朔) 등의 명장을 중용하였으며, 유우석 등을 보호하였던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는 장경 원년에 동도(東都)절도사였던 배도는 여러 차례 황제에게 표문(表文)을 올려, 지추밀(知樞密) 위홍간(魏弘簡),한림학사 원진(元稹)이 유주(幽州)를 토벌하는 일에 방해하는 등 국정을 어지럽혔다고 고발하였다. 그 결과 위홍간은 궁전고사(弓箭庫使)로 좌천되고 원진은 공부시랑(工部侍郞)으로 강등되었는데, 원래 위홍간은 환관이었으며, 원진은 환관의 도움을 받아서 높은 관직에 올랐다는 비웃음을 얻은 인물이다.
이로써 배도의 정치적인 성향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원진은 백거이와 화답한 원백체(元白體)로써 유명할 뿐만 아니라 소설 <앵앵전(鶯鶯傳)>의 작자로서도 유명하다. 하지만 환관의 도움으로 고관을 얻었다는 오점이 또한 있으니, 어찌할 것인가?

그러니 주당들이여!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인지, 한잔 술을 들기 전에 한번 생각해 보자.

배도의 녹야당에 살짝 끼어들어 헌종이 하사하신 용고주(龍膏酒)와 환골료(換骨醪)를 맛보며, 세간의 일이 아닌 그들만의 얘기를 경청하는 일을 한번 상상해보는 것은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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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11/08 [18:17]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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