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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수(歐陽脩)가 취옹(醉翁)이라 한 까닭은?
<강경범의 음주고사>취옹은 무엇에 취하고 싶었을까?
 
강경범 문화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0/04/07 [03:52]

구양수의 초상화 ⓒ
구양수(1007년~1072년)는 자가 영숙(永叔), 호가 취옹(醉翁) 만년에는 육일거사(六一居士)라 했다.

송 인종(仁宗) 천성(天聖)8년(1030년), 24세에 진사에 합격한 뒤 지제고(知制誥).한림학사를 지냈고, 영종(英宗)때는 추밀부사(樞密副使).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으며, 신종(神宗) 때는 병부상서가 되었으며, 태자소부로 관직을 그만두었다.

정치상으로 그는 개혁을 추구하여, 범중엄(范仲淹)의 ‘경력신정(慶曆新政)’을 지지하였고, 시에서는 서곤체(西崑體)의 형식적이고 나약한 풍격을 지양하고 송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문에 있어서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써 송대에 있어서 주도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한림학사 시절에 과거시험을 주관하여 소식.소철 등을 선발했으며, 소순(蘇洵).포증(包拯).왕안석.증공(曾鞏) 등을 조정에 천거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죽은 뒤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의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취옹이라는 호를 쓴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니, 그 이유를 살펴보자.
‘취옹’이란 호를 쓴 이유에 대해서는 그의 <취옹정기(醉翁亭記)>에 잘 나타나 있다.



“……샘 위에 정자가 날개를 펼친 듯 걸려 있는데, 이것이 취옹정(醉翁亭)이다. 정자를 세운 이는 누구인가? 이 산의 스님 지선(智僊)이다. 이 정자의 이름을 지은 이는 누구인가? 태수 자신이 붙인 것이다. 태수는 손님과 함께 이곳에 와서 술을 마시는데, 술을 조금만 마셔도 금방 취했고, 또 나이도 가장 많았기에, 자신의 호를 취옹이라 한 것이다. 취옹의 뜻은 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수간에 있었다. 산수의 즐거움은 마음으로 얻는 것인데 술에 기탁하기 때문이다.……창백해진 얼굴에 백발을 하고서 왁자지껄한 가운데 술에 취해 쓰러진 것은 태수가 취한 모습이다.……”

술에 약한 구양수가 취옹이란 호를 붙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술에 금방 취했고(醉), 나이가 많았기(翁) 때문인데, 취옹이라고 한 의도는 술에 기탁하여 산수를 즐기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이유와 의도를 비약시키면 술에 취하든 산수에 취하든, 그 무엇에 취하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왜 취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의문을 풀려면 그가 ‘취옹정’이 있는 저주(滁州: 지금의 안휘성 저주현)태수로 오게 된 사건을 살펴봐야 한다.

그는 30세(1036년)에 관각교감(館閣校勘)으로 있었는데, 당시 범중엄이 당시의 정치를 비평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요주(饒州)로 폄적당했다. 구양수는 그를 변호하다가 이릉(夷陵: 지금의 호북성 宜昌)의 현령으로 폄적당했다. 이후 다시 복직되었는데, 1045년 그의 나이 39세에 저주로 폄적을 당하는 일이 터진다.

‘경력신정’을 추구한 범중엄.한기(韓琦).부필(富弼) 등은 보수파의 공격으로 폄적을 당하고, 또다시 하북전운안찰사(河北轉運按察使)였던 구양수가 이들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그 역시 저주로 폄적을 당한다.

그런데 그의 죄명은 다름 아닌 ‘남녀간의 문란함(帷薄不修)’이었으니, 그속에 무언가 모함의 낌새가 보인다. 무고함을 당한 구양수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구양수는 물론이거니와 개혁파들 또한 치명적인 타격을 당할 일이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호기심이 생긴다.



구양수의 외조카딸 장(張)씨가 있었는데 구양수 매형의 전처소생으로써 어려서 부모를 잃었기에 구양수가 그를 양육시켜서 조카 구양성(歐陽晟)에게 시집보냈다. 그런데 구양성이 외관으로 나갔을 때 장씨는 구양성의 하인 진간(陳諫)과 간통하는 일이 발생했고, 이 사건은 개봉부우군순원(開封府右軍巡院)에서 심문하였다.

장씨는 죄를 벗어나기 위해 아무렇게나 진술하다가, 시집가기 전 구양수와 애매한 관계를 언급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우군순원의 판관인 손규(孫揆)는 장씨와 진간의 간통사건만을 보고하여 일을 더 키우지 않았다.

그러나 재상 진집중(陳執中)은 그의 심복에게서 장씨의 ‘자백’을 얻어서, 태상박사 소안세(蘇安世)에게 다시 가서 감찰하여, 장씨의 자백을 마음대로 과장하여 안건으로 기록하도록 하였다. 또한 구양수와 앙금을 가진 환관 왕소명(王昭明)을 감독관으로 보냈다. 그런데 왕소명은 양심적인 관리였기에,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였고, 장씨의 자백이 심한 고문으로 인해 꾸며진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하여 소안세도 손규의 조사기록을 손대지 못했고, 다만 구양수가 장씨의 재산을 꿀꺽 삼키고 자신이 산 것이라는 사건을 첨가했을 뿐이었다. 결국 이 안건은 “증서가 이미 분명하지 않고 판별한 필요가 없다(券旣弗明, 辨無所驗)”고 마무리되었다.

구양수는 결국 정치적인 탄압으로 인해 저주로 폄적을 당한 것인데, 여기서 구양수의 취옹이란 호에 의문이 생긴다. 일반적으로 무고하게 폄적을 당했을 경우 대부분은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술에 취하든 산수에 취하여, 조정이나 정사에 대해 관심을 아예 없애버릴 것이다.

그런데 그가 굳이 취옹이란 호를 짓고서 창작한 <취옹정기>는 약간 의도적인 듯한 냄새가 난다. 마지막 부분의 “…사람들은 태수를 좇아 유람하며 즐길 줄을 알지만, 태수가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즐긴다는 사실을 모른다. 술에 취하면 그들의 즐거움을 함께 즐기고, 술에서 깨면 이를 글로써 서술하는 이가 태수다.…”가 그것이다.



필자가 의문을 가지는 것은 그가 취옹이라고 할 때의 나이가 폄적당한 다음해로 본다해도 겨우 40세다. 그런데 옹(翁)이라고 붙인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옛날 봉건사회에서는 관직을 그만두는 일조차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더라도 술에 취하든 산수에 취할 만큼 자신의 마음을 달래는 방법으로써 태수직을 그대로 간직한다는 점은 관직에 미련이 있음에 다름 아니다.

또한 그의 시문을 통해 보면 그는 항상 ‘술병(酒病)’ 혹은 ‘병주(病酒)’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을 볼 때, 술이 약한 것은 사실인 듯 하지만 굳이 술에 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공개한 것은 누구에겐가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지 않는지 의문이다.

필자가 볼 때 그가 취옹이라고 한 것은 “산수가 되었건 술이 되었건 잠시 동안 취한다”는 의미로 보인다. 이 시기에 그는 아직까지 혈기가 왕성하여 <붕당론(朋黨論)>을 지어 보수파들을 공격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면은 그가 만년에 호를 ‘육일거사(六一居士)’라고 한 것과는 약간 차이가 난다.

“나에게 ≪집고록(集古錄)≫천권,장서 만권,거문고 하나,바둑판 하나,술주전자 하나, 그리고 그 속에서 늙은 자신, 그리하여 육일이 되었다.”(<三朝言行錄>)고 한 것에서 취옹이란 호를 붙인 시기와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곧 세상을 달관한 늙은이의 정서가 그대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또 그가 저주에 와서 취옹정을 얻기 전에 먼저 풍락정을 얻어서 쓴 <풍락정기(豐樂亭記)>를 보면, “……다행히 그곳의 백성은 그해 곡물을 풍성하게 거둬 나와 함께 유람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곳의 산천을 근거로 하여 그곳 풍속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백성들에게 이 풍년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운좋게 무사태평한 때를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였다. 대저 황제의 은덕을 선양함으로써 백성과 함께 즐기는 것이 자사(刺史)의 직무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정치적인 박해를 받아서 폄적을 당한 사람이 ‘황제의 은덕을 선양……’운운 하는 것은 성인의 마음을 지녔든지, 그것이 아니면 자신의 본심을 속인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필자는 후자라고 보는데, 그 이유가 그의 음주시와 음주사를 보면, 폄적을 당한 억울함을 노래한 시가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음주의 내용이 대부분 저주를 떠날 때 이별의 슬픔을 노래할 때(<별저(別滁)>), 친구간의 이별(<송사중사이수(送謝中舍二首)>), 계절의 변화에 대한 감상(<접련화(蝶戀花)>,<학충천(鶴冲天)>,<조중조(朝中措)>,<낭도사(浪淘沙)>,<어가오(漁家傲)>,<소년유(少年游)>,<몽중작(夢中作)>,<춘일서호기사법조가(春日西湖寄謝法曹歌)>,<여사삼학사창화8수(與謝三學士唱和八首)>,<소도(小桃)>,<풍락정소음(豐樂亭小飮)> 등등에 관한 것이었다.

나아가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서로간의 의도에 의한 것인지는 몰라도, 범중엄(范仲淹) 역시 은주(鄞州: 지금의 하남성 은주현)지주로 폄적을 당하여, 같은 해인 경력6년(1046년)에 악주(岳州)지주 등종량(滕宗諒)의 청을 받아 천고의 명문인 “세상사람이 걱정하기에 앞서 걱정하고, 세상사람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한다.”는 <악양루기(岳陽樓記)>를 썼다는 점이 예사롭지가 않다.

필자는 항상 구양수에 대한 이미지는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그 나름대로 정치.학술에서 진취적인 면을 가지고 송대의 정계와 시단을 주도한 그의 능력에 경의를 표한다. 그의 ‘취옹’에 대해서는 필자가 너무 비틀어서 해석했을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샛님같은 그가 굳이 취옹이라고 한 사실에 대해 동정하는 마음이 앞섰음을 고백한다.
아! 세상은 개혁을 추진하여 변화해야 한다는 것은 진리인 듯 하다. 나아가 또한 술이 사람의 시름을 잊게 해준다는 것 또한 그것 못지않은 진리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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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4/07 [03:52]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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