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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악하고 음란한 문선제(하)
<강경범의 음주고사>북제 문선제(文宣帝) 고양(高洋)
 
강경범 문화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0/05/17 [08:01]
고양의 극악무도하고 음란한 행위는 입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로 상식에 벗어나서 동정은 커녕 육두문자가 목을 차고 올라올 정도다.


그런데 이상하다. 북제 문선제의 자료를 보면 볼수록 뭔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이 든다. 다른 이들이 주장하듯 그는 정말 알콜중독자거나, 정신병자일까? 알콜중독자나 정신병자가 아닐지라도 ‘쾌도난마’의 고사를 보듯 그는 수많은 살인을 저지른 것만은 사실인 듯 하다.

그런데 그는 왜 수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던 것일까? 이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게 된다면 단순히 알콜중독이나 정신병에 의해 선량한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는 오해도 풀릴 것이다.

균형적인 감각을 유지하고 사건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당시의 상황을 기초부터 전체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다.

먼저 북제의 역사를 기술한 ≪북제서≫,≪북사≫와 ≪자치통감≫은 당(唐)대와 송대에 한족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북제가 세워진 당시 중국은 남조와 북조로 나뉘어졌는데, 역사의 시선은 한족이 지배한 남조 위주로 진행되었고, 선비족과 선비화된 한족이 지배한 북조의 역사는 한족에 의해 폄하될 여지가 다분하였다.

그렇기에 한족은 이들의 역사로써 거울로 삼으려는 의식이 잠재했기에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과장해서 기술했을 것이다.

나아가 북위에서 북제가 들어설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선비족(鮮卑族) 탁발씨(拓跋氏)에 세워진 북위는 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했는데, 이는 곧 호족의 중국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이려면 한족을 끌어들였을 것이고, 이는 기존의 호족와 한족간의 갈등이 야기되는 것은 자명하다.

‘우림의 변(羽林之變)’과 ‘육진의 난(六鎭之亂)’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황실내부의 갈등 속에서 육진 중 하나인 회삭진(懷朔鎭) 출신인 고환(高歡)과 무천진(武川鎭) 출신의 우문태(宇文泰)가 역사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에 고환이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534년 고환의 통제를 받던 효무제(孝武帝)가 낙양을 탈출하여 우문태가 있던 장안(長安)으로 피신하였고, 고환은 다시 효정제(孝靜帝)를 옹립하여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나뉘게 된다.

547년 고환이 죽자 그의 아들 고징(高澄)이 승상의 직위를 이어받아 한족문벌을 우대하고 훈귀(북족계열의 장군)를 탄압하자, 후경(侯景)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그 와중에 549년 고징이 갑자기 주방장 인경(藺京)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고, 고양이 이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훈귀의 세력을 누르고 선양을 강행하는데, 이를 지지한 세력은 바로 양음(楊愔) 등의 한족세력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북위의 원씨(元氏: 즉 拓跋氏)를 죽이고, 선양을 반대한 훈귀세력을 탄압하고, 간언하는 일부 한족을 죽이게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고양은 훈귀세력과 한족세력의 갈등 속에서 북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차별적인 살인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양이 죽은 뒤(사실 그의 죽음조차도 의심스럽다) 북제의 황위는 고양의 동생 고연(高演)의 손에 들어가는데, 이는 당시 훈귀세력을 장악한 고양의 모친 누(婁)태후를 등에 업은 쿠데타였던 것이다. 고연 또한 재위 1년만에 죽고, 동생 고담(高湛)이 즉위하는데, 누태후는 역사상 보기 드물게 고환의 부인으로써 네 명의 아들이 모두 황위에 오르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첫째 아들 고징은 황위에는 오르지 못하고 뒤에 추서된 것임)

그가 ‘농담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不好戱弄)’거나 형제에게 모욕을 당해도 아무런 대꾸로 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어려서부터 그는 권력의 냉혹함을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즉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처세가 바로 그것이다.



≪북제서≫에 “진양(晋陽)에는 스님이 있었는데 어리석은 듯 하기도 하고 지혜롭기도 한데, 당시 사람들은 그를 헤아릴 수 없어서 아독사(阿禿師)라고 불렀다.”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이 그에게 어지러운 정국에서 ‘명철보신’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라 여겨진다. 그렇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겨우 21살인 그가 나서서 정권을 잡았을 수 있었고, 어리석어 보였기에 아무런 반감도 없이 한족세력의 지지를 얻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첫째. 비정상적인 행동 부분을 보면, 그야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특히 [사례3]의 양음은 자신이 총애한 신하로써, 자신의 사후에 쿠데타로 인해 고연에게 죽임을 당하는 충직한 한족임에게도 불구하고 그러한 행동을 보인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혹 이해될 만한 자세한 상황은 잘라버리고 고양의 비정상적인 부분만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사례4]에서 언급한 것은 약간 과장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고양은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한 것인지 누태후의 권세가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어머니라고 하더라도 황제의 종아리를 때린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나아가 어머니를 오랑캐에게 시집보낸다거나 술을 반쯤 깬 상태에서 어머니의 의자를 잘못해서 넘어뜨렸다는 대목에서도 약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러한 서술이 곧 고양을 완전히 알콜중독자나 정신병자로 인식되도록 만든 것이다.

그는 효자였기에 어머니를 재가시켜드리려고 의논한 것이 이렇게 변질되었거나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어머니가 앉아계신 의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데, 용서를 받아주지 않아서 발을 잡고 애걸복걸하는 찰라 어머니가 일어서면서 넘어진다는 상황설정은 너무 동정론에 입각하여 소설을 쓰는 것일까?

어쨌든 그의 비정상적인 언행을 보면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이에 관한 사료가 부족한 현재로선 ‘쾌도난마’한 그의 성격과 과음이 절묘하게 어울린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둘째. 잔혹한 살인이다. 그가 아무런 이유없이 살인하며 즐겼다면 정신병자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당시 그가 동위를 멸하고 황위를 찬탈했기에 모든 신하가 지지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극단적으로는 모반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를 들면 천보(天保)2년 정월에 이전 왕조에서 황문시랑 지냈던 원세보(元世寶)와 통직산기시랑(通直散騎侍郞)을 지냈던 팽귀평(彭貴平)이 모반을 꾀했는데, 그들을 죽이지 않고 귀양을 보낸다. 2월에 태위(太尉) 팽락(彭樂)이 모반하여 목베어 죽였다. 천보8년에 기주(冀州) 사람 유향(劉向)이 경사에서 모반하였는데 이들을 모두 죽였다.

이와는 다르게 그는 또한 대사면을 펼치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가 무작정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가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즉 천보(天保)7년 개축하면서 7월에 대사면을 펼치고, 천보9년 4월에 대사면을 펼치고, 천보9년 11월에 새로운 궁전이 완성되자 또 대사면을 펼친다.

[사례2.3.4]는 정권유지의 절박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전 왕조의 원씨를 말살한 때가 그가 죽기 1년 전인 559년에 벌인 점을 간과할 수 없으며, 이는 아마도 그의 죽음과도 관계있을 것이다.

[사례5]만 읽어보면 그는 분명 정신병자다. 그런데 이속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숨겨져 있다. 고징의 딸 낙안공주(樂安公主)를 상서우복야 최섬의 아들 최달노(崔達孥)에게 시집보냈다. 고양이 공주에게 결혼생활을 물으니, “집안에서는 나를 공경하고 사랑스럽게 대하는데, 시어머니만은 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충신의 부인을 쉽게 죽인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렇기에 사서에서 잔혹한 임금으로 언급하는 것은 자신이 초래한 ‘쾌도난마’의 업보인 셈이다.

[사례6.7]은 고양이 황위에 즉위할 때도 상당한 반대세력이 존재하였고, 이후에도 한족세력과 훈귀세력의 갈등 속에서 고민했다는 증거다. [사례7]을 보충하면, 고융지는 고양이 황제에 오르기 전에도 그를 모욕하고 무시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기도 했지만, 고융지의 죽음은 같은 해 원욱(元旭)이 죄를 얻어 죽임을 당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元旭과 元昶은 같은 인물인지, 동기간인지 확인이 안됨)

넷째. 음란함에 대해서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특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고징의 처 풍익공주(馮翊公主) 원씨(元氏)와 자신의 작은 어머니가 되는 이주씨(爾朱氏)를 탐했다는 것이다. 당시 북조에는 형사취수(兄死取嫂)의 결혼풍속이 남아있다고 하지만 북제의 고씨 집안이 유독 이러한 모습이 심하다.

즉 고환은 이주영(李朱榮)의 딸(魏莊帝의 황후).이주조(李朱兆)의 딸(建明帝의 황후).정대차(鄭大車: 魏廣平王妃), 풍씨(馮氏: 任城王妃).이씨(李氏: 城陽王妃)를 얻었다.

고징은 원씨(元氏: 薛寘의 처)를 억지로 얻고, 고신(高愼)의 처를 겁탈했으며, 다시 원옥의(元玉儀: 孫騰의 기생)․원정의(元靜儀: 원옥의의 언니이며 崔括의 처)를 얻고, 또 정대차와 사통하였고, 마지막엔 연연공주(蠕蠕公主: 고환의 처로써 고징의 어머니뻘임)와 사이에서 딸을 두었다.

고양은 원씨(元氏: 고징의 황후)와 간음하고, 왕씨(王氏: 崔修의 처).설씨(薛氏)자매를 겁탈했다. 또한 동생의 고준(高浚).고환(高渙)을 죽이고 그들의 처를 겁탈했다.

고담(高湛)은 李氏(고양의 황후)를 강간하고, 뒤에 이씨(李氏: 魏靜帝의 빈비).왕씨(王氏: 고양의 빈비).팽락녀(彭樂女)와 임상녀(任祥女: 이들은 아직 妃로 세우지 않은 궁녀임)를 부인으로 삼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하다. 단순히 욕정을 채우려 했다면 수많은 궁녀를 두고서 이전 왕조의 왕후나 가족간의 부인을 취했다는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북제가 멸망한 원인이 고양의 잔인무도하고 음란함으로 인해 비롯된 것이라는 오해를 풀어준다면, 북제의 멸망은 황족 내부의 갈등, 한족세력과 훈귀세력의 갈등 때문이라고 하겠다. 굳이 그와 관련시킨다면 그의 잔인무도하고 음란함보다는 고양 말기에 화려한 궁전과 수많은 절을 지으며 국고를 낭비하였고, 흉년이 계속된 것도 한 몫 하였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였던가?
여기까지 기술하고 나니, 약간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혹 필자의 무지로 인해 잔혹하기 그지없는 인물을 너무 옹호하고 나선 것은 아닌지 염려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글을 쓰고 싶은 저면에는 한족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시각을 약간이라도 개선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중국의 역사든 문학이든 지금까지는 한족의 시각에서 서술된 자료를 접했다면 이제부터라도 그들이 홀시한 북조(北朝)와 원대(元代)의 역사문화에 대해도 균형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앞으로 유럽권이나 아메리카권에 대응할 아시아권이 형성될 터인데, 다른 민족의 역사문화를 인정하지 않고서 동아시아가 되었건 전아시아가 되었건 이들 나라와 민족이 어떻게 융합할 수가 있겠는가?

동북공정과 관련해서 주제넘게 한마디 하자면,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이면에는 중국의 아픔이 있음을 말해준다. 대대로 중원을 이민족에게 지배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중국의 입장에서는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그래서 머리를 쓴 것이 현재 중국이 관할하고 있는 영토 안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라고 정의를 내린 것인데, 이 자체가 모순을 가지고 있기에 앞으로 중국내의 55개 소수민족은 물론이거니와 주변국과의 갈등을 계속 야기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징기스칸의 원(元)나라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하니 세상이 웃을 일이지만 그들은 또한 저세상에서 징기스칸의 말발굽에 짓밟힌 자신들의 조상을 무슨 낯짝으로 볼 것인가? 나아가 만주족인 청(淸)나라 역사는 또 어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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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5/17 [08:01]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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