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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만에 무너진 산아제한, 다산(多産)이 국가의 미래다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 - 잊혀진 성석기행〉저출산으로 대한민국 존폐위기
 
최진연 기자 기사입력  2015/10/28 [09:54]

인류가 존속하는 한 성(性)을 주제로 한 담론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다.

 

▲ 가을단풍에 불타는 남근석     © 최진연 기자


의학이 발달하지 않고 질병이 만연하던 옛날에는 자식을 많이 두는 다자(多子)가 미덕이었다. 자식을 둔 사람은 더 많은 자식을 갖기를 원했고, 자식이 없는 부부는 기자(祈子)를 염원했기에 성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와 풍습이 생겼다.
    
그러나 출산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의술이 발달된 뒤로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 이 땅에도 산아제한의 열풍이 지나간 적이 있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70년대 초반, 전국에는 이런 구호와 벽보가 넘쳐났다. 당시 우리사회는 한 가정에 작게는 5∼6명, 많게는 12명의 아이들이 복작돼 한 연필 한 다스란 유행어가 돌 정도로 대가족을 이뤘다.
    
초등학교 교실은 콩나물시루처럼 아이들이 넘쳐나 2부제 수업을 해야만 했던 시절,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는 국가시책이 탄력을 받았다. 인구증가를 우려한 정부는 산아제한 정책을 본격화했다. 남성불임수술이 권장됐고 예비군훈련장에서는 정관수술을 받으면 훈련이 면제되기도 했다.
    
농경사회의 빈곤과 절박함에서 벗어나 산업입국을 위한 몸부림의 대가로 치룬 산아제한. 그러나 반세기만에 이 나라에는 아기울음 소리가 사라졌다. 저 출산과 이농현상 등으로 농촌지역은 초등학교 입학생이 없어 폐교가 속출하고 있다.
    
30년 후에는 산업전반에 인력이 부족해 국가의 기반마저 흔들릴 지경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최근 정부도 3명이상 낳기 장려운동을 펼치고 있다. 출산비용, 자녀등록금, 주택자금, 각종세금 해택 등 지원에 나섰다. 

 

▲ 조선시대 대표적인 전북 순창군의 팔왕마을 남근석     © 최진연 기자


불과 40여년 사이, 우리나라는 인구감소를 우려할 정도로 세계적 저 출산국가의 반열에 올랐다. 경제성장이 급속하게 이뤄졌지만 양육비와 교육비가 엄청나게 증가한데다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결과이기도 하다.
    
지금과 같은 저 출산이 계속되면 70년 후에는 인구가 절반으로 줄고 120년 후에는 5분의 1로 급감한다는 조사까지 나왔다. 2014년 8월 22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어느 야당의원이 국회 입법조사처에 의뢰한 대한민국의 인구변화를 예측한 결과다.

 

영국 옥스퍼드대 데이비드 콜먼교수는 지난 2006년 “한국은 저 출산이 심각해 인구가 소멸되는 지구상의 첫 번째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선조들이 종족번식을 기원하던 과거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것은 아닐까? 
        
자식을 바라는 기자(祈子)의 염원이 담겨 있는 남근숭배(男根崇拜)가 새삼 그리워진다. 이들 성석에는 우리민족의 건강한 성의식이 깃들어 있다. 수백 년 또는 수천 년을 그들과 함께 한 남근석(선돌, 입석)들은 묘하게도 산아제한의 기치가 드높던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이른바 미신과 무속타파라는 이름으로 파괴됐다. 남아있는 것마저 어느 부잣집 정원으로 옮겨지거나 사라졌고, 다행히 마을주민들의 보살핌으로 남은 것은 이제 얼마 되지 않는다.
 

▲ 여성의 음부를 빼닮은 삼척 쉰움산 음샘     © 최진연 기자



전국에는 성석과 관련된 유적이 840여기나 있었다 한다. 하지만 1970년대 초 미신타파 라는 명분으로 대부분 잊혀지고 사라졌다. 현존하는 120여기만 현존하고 있다. 이들 토속신앙의 성석은 청동기시대의 경남 울주 암각인물화, 신라 토우와 뱃사공 토기의 남근, 안압지출토 목제남근 등 신라시대와 통일신라,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2,000년의 역사에 걸쳐 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잘 생긴 선돌 하나쯤은 하늘을 향해 떡 버티고 서있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하나뿐 아니라 두개가 서로 뽐내고 오가는 길손을 맞는 곳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는 남성이나 여성의 은밀한 부분을 닮은 바위들도 있다. 남성의 힘을 상징하는 남근석, 생산과 풍요를 바라는 여근석. 특이한 것은 마을 뒷산 또는 앞산에 여근곡이 있으면 그 맞은편에는 꼭 남근을 세웠다.

 

여인네들의 음욕을 잠재운다는 생각에서 남근석과 여근석을 세운 마을사람들은 지금도 대를 이어 의식을 해마다 치르고 있다.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정월 초이튿날과 대보름날 젊은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여 제를 올린다.
    

▲ 경기도 가평 승안리의 용추계곡 남근석     © 최진연 기자


사람의 손때가 묻어 있는 반질반질한 남근석에는 수많은 세월동안 사람의 마음과 손길, 사내아이를 바라는 여인네들의 한 맺힌 소리까지 담겨 있으리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들마저 쉬어가는 산간오지의 남근석은 마을수호신으로서 대접도 받는다.
    
농경사회에서는 다산을 바라며 자연에 의지하고 살아가던 우리선조들의 지혜가 남근석에는 묻어있다. 이처럼 앞, 뒷산의 여근곡과 남근석은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희망의 상징물이었으며 마을지킴이로서 우리의 정서, 우리의 삶 그 자체였다. 
    
필자는 1970년대 후반부터 전국에 산재한 성곽을 답사하고 실태를 사진과 글로 기록해 오고 있다. 대분의 성터들은 산간오지마을 또는 험준한 산등성이에 방치돼 있어 일반인들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 많다. 성터 찾아가는 산촌마을에는 허물어졌지만 옛 다리도 만났고, 그 돌다리 건너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잘 생긴 남근석이며, 더러는 못생긴 남근석도 보았다.

 

산성과 봉수, 옛 다리에만 사진 찍는데 미쳐있어 남근석은 늘 뒷전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 찍어두었던 남근석 사진들을 한장 한장 들춰내면서 아직도 그것들이 온전하게 남아있을까 다시 달려가고 싶은 욕구가 울컥울컥 솟는다. 
 

▲ 나주시 남평읍 동구몰의 삿갓쓴 남근석     © 최진연 기자


지금까지 카메라에 담은 성석들은 107여 개소였다. 이중에는 자연적으로 성석형태를 가진 것과 인위적으로 다듬어진 성석, 선돌, 입석이 포함돼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남성적인 것은 제천 동산에 위치한 남근석이다. 여근석은 서울 불암산 기슭의 밑 바위다.
    
대체적으로 경기도 북부지역에는 자연적으로 생긴 성석이 많았다. 강원도의 해안지방에서는 나무로 깎은 남근을 여서낭에 바치는 제의도 있다. 중부지역은 1~2m정도 높이의 선돌이 분포돼 있으며, 대부분 선사시대 때 토속신앙 숭배지다. 남부지역은 잘 다듬어진 남근석이 주류인데. 대게 조선시대 때 것으로 추정된다.
    
남근석 신앙숭배는 개인과 마을공동체로 나눈다. 개인 신앙은 대부분 자식을 바라는 것이 대표적이다. 마을신앙으로는 수호신과 풍농을 비는 동제 형태다.
    
성(性)은 오랜 기간 유교전통에 갇혀 왔다. 그 영향은 지금도 남아있다. 성에 대한 관심을 겉으로 드러내면 누구나 천박한 부류로 취급당한다.
    
하지만 지금 전국각지에 남아 있는 남여근석은 조상들이 성에 대한 관심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토속신앙의 상징물이다. 이들 앞에서만큼은 성에 대한 표현이 결코 천박해지지 않는다.
〔경기데일리 = 최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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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0/28 [09:54]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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