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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육계, 제1계 만천과해의 활용된 사례(2)
『만천과해(瞞天過海)』를 사용하는 정치투쟁상의 상용수법
 
서상욱 역사가 기사입력  2007/02/26 [11:32]

 

묵계 서상욱님은 해박한 동양의 역사와 주역, 의서에 통달한 분으로 현재 대학교 강사 및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동양 고전과 역사 및 철학에 조예가 깊다.

총명하고 관찰력이 높아서 이 계책을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필수적인 하나의 재능이 될 것이지만, 그 재능이 노출되면 정치활동 중에 중요한 기피인물로 낙인(烙印)된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 고대의 관계(官界)에서 자주 나타난 현상으로 재능이 낮으면 권세를 쥐는 것에 불과하지만, 권세가 커지면 자기의 재능이 다른 사람보다 높다는 생각을 한다. 이 말은, 전제적 정치체제에서 전제군주는 모든 것에 통달한 위대한 인물이며, 상사(上司)는 언제나 정확하고 고명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재능이 있는 사람은 가장 먼저 군주나 상사의 면전에서 자신의 능력을 숨길 줄 알아야 한다.


신료(臣僚)나 부하는 군주나 상사의 능력을 능가할 수 없고, 자기의 재능을 드러낼 기회가 없으면 숨기고 있다가 능력을 발휘할 찬스가 오면 일정한 대가를 받게 되고 그것은 자기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한다.

동한말(東漢末)의 양수(楊修)는 권신(權臣) 조조(曹操)의 주부(主簿)로서 ‘학문을 좋아하는 준재’였으며, 총명함이 남달랐던 사람이다. 그러나 대대로 공경(公卿)이었던 집안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자기의 재능을 감추지 못하고 오히려 자부심이 높았다. 조조(曹操)는 사람들을 부리는데 비상(非常)하고 능숙한 재능이 있었던, 분쟁시대의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재능이 있는 사람을 질투하는 마음이 있어서 문인들을 경시하고 무인들은 얕잡아 보았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앞으로 이야기하는 큰 보복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일은 가벼워도 타격을 받게 되고 심하면 몸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조조(曹操)는 ‘제장(諸將)들이 비록 전승(戰勝)의 공이 있거나 계획을 세웠다고 해도 법을 어기면 죽인다’라는 사람이었으니, 양수(楊修)가 비록 재능이 있다고 해서 용납했을 리가 없다. 더구나 양수(楊修)는 조비(曹丕)와 조식(曹植)의 후사분쟁(後嗣紛爭)에 개입하여 조조(曹操)에게 심한 불만과 미움을 받고 있었다.
조조(曹操)가 한중(漢中)을 평정하러 갔다가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졌을 때, 마침 전령(傳令)이 ‘계륵(鷄肋)’이라는 암구호(暗口呼)를 받았는데, 이것을 안 양수(楊修)가 “계륵(鷄肋)이란 먹으려고 해도 먹을 것이 없고 버리려고 하면 아까운 것이니 분명히 내일이면 후퇴명령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며 미리 군장(軍裝)을 꾸렸다. 조조(曹操)는 이 기회에 군심(軍心)을 어지럽혔다는 죄명을 씌워 양수(楊修)를 죽이고 말았다.

양수(楊修)가 피살된 것은 자업자득인 면이 있다. 과거에 양수(楊修)는 조식(曹植)이 조조(曹操)에게 신임을 받도록 하는 계책을 세웠고, 권력투쟁 과정에서 일단 재능이 노출되었다가 여러 차례 조조(曹操)의 주목을 받았다. 유혈이 낭자한 정치현실에서, 군주와 상사의 면전에서는 자신의 재능을 숨겨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천과해(瞞天過海)』는 평소와 달리 폭넓은 응용조건을 활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서한(西漢)의 개국공신(開國功臣) 진평(陳平)은 기계(奇計)에 뛰어나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천하를 얻는데 기공(奇功)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공로 때문에 자연히 질투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모두 진평(陳平)의 계략으로 해결이 되었다. 그가 여러 차례의 질투로 인한 곤란함과 죽음을 면할 수가 있었던 것은 자신의 재능을 절묘하게 엄폐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여후(呂后)가 집권을 하고 있었을 때, 여후(呂后)의 자매(姉妹)인 여수(呂嬃)가 늘 진평(陳平)을 비난하였는데 그 중에사 가장 큰 죄명이 ‘승상이 되어 정치를 돌보지는 않고 매일 술을 마시며 여자를 좋아한다’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진평(陳平)은 절제를 하지 않고 오히려 나날이 더 심하게 행동을 하였다. 그것은 자기 마음속에는 좋은 술과 아름다운 여자만 있을 뿐이지 다른 야망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 여후(呂后)에게서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진평(陳平)은 태위(太衛) 주발(周勃)과 함께 권력을 농간하던 여씨 일족을 죽이고 한(漢)나라를 안정시키는 큰 공로를 세울 수가 있었다. 그러나 큰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다시 탄핵을 받게되자 진평(陳平)은 병을 핑계로 은퇴를 하고 있다가, 한문제(漢文帝)가 직접 불러서 묻자, 진평(陳平)은 “고제(高帝) 때는 주발(周勃)의 공로가 신(臣)보다 못했지만, 여씨(呂氏)들을 주살(誅殺)할 때는 신(臣)의 공로가 주발(周勃)보다 못했습니다”라고 하여,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문제(漢文帝)의 신임을 얻어 여생을 잘 마칠 수가 있었다.


진평(陳平)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음모(陰謀)를 꾸미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는 늘 맑은 사람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음모(陰謀)를 많이 꾸몄고, 도가(道家)를 금지하였다. 내가 세간에서 살고 있거나 숨어 있거나 그렇게 하겠지만, 마침내는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은 내가 꾸민 음모(陰謀)로 화(禍)를 당한 탓일 것이다.”

이 말은 진평(陳平)의 스스로에 대한 평가이다. 그러나 진평(陳平)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자기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고 후세에 자손들이 남아있었겠는가? 은(殷)의 주왕(紂王)은 중간치기 정도의 재능으로 주색(酒色)을 좋아하여 밤을 세우기가 일쑤였다.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한 탓으로 밤낮을 구분하지 못했고 좌우의 사람들에게 물어도 모두 모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파견하여 당시에 현명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고 있었던 기자(箕子)에게 물었다. 기자(箕子)는 자기가 몹시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천하의 주인을 위하여 한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해를 잃어야 하다니 참으로 위기로구나. 한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나 혼자만이 안다고 하니 내가 위험하구나!”

기자(箕子)는 할 수 없이 만천과해지계(瞞天過海之計)를 사용하여 정신이 혼미한 척 하고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복잡한 정치투쟁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자기 멋대로 시비(是非)를 가리는 위험성이 있다. 만천과해지계(瞞天過海之計)를 사용하여 곤란에 빠진 자기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주동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보다 못하고, 주동적인 사용자는 이 계책을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 못하며, 이 계책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계책을 사용하여 이 계책을 깨뜨리는 사람보다 못하다. 이미 아시다시피 만천과해지계(瞞天過海之計)를 운용할 때는 ‘익숙한 것은 정확히 분별하지 못하고, 늘 보던 것은 의심을 하지 않는다(熟視无睹, 常見不疑)’는 것이 요점이다. 그러므로 평소에 자주 대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에 대한 가상(假象)의 이미지에 속기 쉽다. 그러나 두뇌가 맑은 사람은 이런 경우에 쉽게 당하지 않는다.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위왕(威王)이 바로 이런 사람이다.

제위왕(齊威王)은 BC 356년에 즉위하였다. 당시의 제나라는 국세가 나날이 약해졌고 삼진(三晋)이 빈번하게 침범하여 영토를 빼앗겼다. 더구나 약소국이었던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게도 자주 핍박을 받았다. 삼진(三晋)은 영구(靈丘)를 침략하였고, 조(趙)나라는 견지(甄地)를 빼앗았으며, 노(魯)나라는 양관(陽關)으로 쳐들어왔고, 위(衛)나라는 설릉(薛陵)을 빼앗았다. 외란(外亂)이 닥쳐온 가운데 내우(內憂)까지 겹쳐졌다. 경대부(卿大夫)들이 마음대로 정권을 흔들며 각자가 주인행세를 하였고 입만 열면 정치의 도리를 떠들었다. 이러한 권신(權臣)들이 정권을 잡자, 영신(佞臣-아첨하는 신하)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서로 비난하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제위왕(齊威王)은 고뇌를 하였지만, 한스럽게도 근본적인 치유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위왕(威王)이 내궁(內宮)의 오른쪽 방에서 거문고를 뜯고 있다가 유명한 거문고 연주자였던 추기자(騶忌子)를 불러서 그의 연주를 듣고자 하였다. 추기자는 대뜸 문을 밀고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

“거문고 소리가 좋구나!”

위왕(威王)은 기분이 나빠서 벌떡 일어나 보검을 뽑아들고 말했다.

“선생은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만나자마자 뭐가 좋다는 거요?”

추기자(騶忌子)는 위왕(威王)이 화를 내는 것을 보고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천천히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대현(大弦)의 성음(聲音)은 중탁(重濁)하지만 온화하고 관대하기가 마치 봄날과 같아서 군주의 모습입니다. 소현(小弦)은 청렴하고 어지럽지 않아서 마치 보좌(補佐)를 하는 것 같습니다. 현(弦)을 깊숙이 잡았다가 느슨하게 풀어놓는 것은 정령(政令)과 같습니다. 고르게 잘 어우러져 서로 화음을 이루려면 대현(大弦)과 소현(小弦)이 서로 보완을 해야 하며, 회전(回轉)을 왕복해야 서로 다치지를 않으니 이것은 사계절(四季節)과 같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저는 이 거문고를 타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말을 자세히 들은 위왕(威王)은 할 수없이 수긍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 말하는 소리가 좋구나”

추기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비록 말 한마디, 음(音) 하나에도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이 그 속에 모두 들어있습니다.”

위왕(威王)은 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분이 나쁜 표정으로 물었다.

“모든 말과 오음(五音)은 나름대로의 법도가 있는데 선생의 말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이 어째서 거문고 줄과 거문고 몸통의 관계라고 합니까?”

추기자(騶忌子)가 대답을 하였다.

“무릇 대현(大弦)의 탁한 소리는 따스한 봄과 같으니 군주(君主)요, 소현(小弦)의 맑고 깨끗한 소리는 재상(宰相)이며, 현(弦)을 깊이 당겼다가 천천히 놓아서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은 정령(政令)이고, 고르게 어우러져 소리를 내는 것은 대소현(大小弦)이 서로 도움을 준 덕분이며, 서로 다르지만 해치지 않은 탓으로 사계절과 같습니다. 무릇 오고가지만 어지럽지 않은 것은 나라를 창성(昌盛)하게 다스리는 요체이며, 쉼 없이 이어지니 존망(存亡)이 여기에 딸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문고의 음조(音調)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마찬가지라 하는 것입니다. 무릇 국가를 다스리는 것과 백성을 아우르는 것을 어찌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추기자(騶忌子)의 음악을 통한 설득을 듣고 총명하고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제위왕(齊威王)은 비록 유세객(遊說客)을 싫어하였지만, 실제로는 그의 말과 큰 차이가 없는 정치를 펼쳤다. 국내외가 모두 어려움에 빠진 상황에서, 제위왕(齊威王)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주왕(周王)을 찾아가 천자의 정통성에 기대고자 하였다. 당시는 이미 주왕실(周王室)의 힘이 미약하여 제후들이 조공(朝貢)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서, 홀로 제(齊)나라가 조공을 하여 위왕(威王)이 천하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였다.

또 다른 방편으로 내부를 정돈하기 위하여 우선 지방관들을 관찰하여 침묵을 하는 자와 아부를 하는 자로 양분하였다. 제위왕(齊威王)은 먼저 침묵을 하고 있던 대부를 물러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침묵을 지키게 되면서 훼언(毁言)이 오늘날과 같이 없어졌다. 그러나 내가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그대가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전야(田野)를 개척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관청에는 밀린 일이 없어서 동방이 편안해 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내 측근들에게 아무런 공로를 내세우지 않았다”

제위왕(齊威王)은 곧 그를 만호(萬戶)에 봉(封)했다.

그 다음에는 아부를 하는 대부를 불렀다.

“그대가 듣기 좋은 말을 하게되면서 오늘날 칭찬하는 말이 늘었다. 내가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니 그대가 듣기 좋은 말은 많이 하였으나, 전야(田野)가 개간되지 않아 백성들이 빈곤해졌다. 지난날 조(趙)나라가 견(甄)을 공격했을 때 그대는 구원을 하지 않았다. 위나라가 설릉을 빼앗았을 때는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내 측근들을 후하게 대하여 명예를 얻고자 하였다.

위왕(威王)은 즉시 아부를 하던 대부와 측근에서 좋은 말만 하던 사람들을 모두 삶아 죽였다. 그러자 제(齊)나라 전역이 두려움에 떨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감히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오로지 성실하게 살았다. 이로서 제나라는 잘 다스려지게 되었다. 이후 20여년 동안 제나라는 병화(兵禍)를 입지 않았다.


제위왕(齊威王)은 총명하고 통찰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잘 알아보고 쓸 줄도 알았다. 당시에 ‘위위구조(圍魏救趙)’와 ‘증병감조(增兵減竈)’로 위(魏)나라의 대군을 세 번이나 패퇴시켰던 명장 전기(田忌)와 손빈(孫臏)이 제위왕(齊威王)에게 중용(重用)되어 이름을 떨쳤다.

제위왕(齊威王)은 인재를 보물과 같이 생각하였다. BC355년, 제위왕(齊威王)이 위혜왕(魏惠王)과 회맹(會盟)을 할 때 위혜왕(魏惠王)이 제위왕(齊威王)에게 보물을 자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과인(寡人)은 비록 소국이지만 구슬을 좋아하여 수레의 전후에 12명을 태우고 10매씩을 들고 비추게 합니다”

제위왕(齊威王)은 이렇게 대답했다.

“과인(寡人)이 있는 곳에는 왕이 보물을 가지지 못합니다. 나의 신하로 단자(檀子)라는 사람이 있는데 남성(南城)을 지키고 있습니다. 초(楚)나라가 감히 침범을 하지 못하고 사수(泗水) 부근의 12제후가 조공(朝貢)을 합니다. 또 반자(盼子)라는 신하가 고당(高唐)을 지키고 있는데 월(越)나라가 감히 하수(河水) 동쪽에서 고기잡이를 하지 못합니다. 검부(黔夫)라는 신하는 서주(徐州)를 지키고 있는데 북문에서는 연(燕)나라가 제사를 지내고 서문에서는 월(越)나라가 제사를 지내며 두 나라에서 70여가가 이사를 왔습니다. 또 종수(種首)라는 신하는 도적을 잡는데 길에서 떨어진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네 명의 신하가 천리를 비추고 있으니 어찌 12승(乘)이 부럽겠습니까?”

이와 같이 사람을 잘 알아보고 활용하는 경우는 만천과해지계(瞞天過海之計)를 사용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아첨을 하던 대부가 제위왕(齊威王)의 측근들을 통하여 자기를 높인 것은 만천과해지계(瞞天過海之計)를 쓴 경우지만 제위왕(齊威王)을 속이지 못했다. 제위왕(齊威王)이 훼예자(毁譽者)를 즉시 징치(懲治)하지 않았던 것은, ‘만(瞞)’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본심을 알기 위해서였으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후에 전광석화같이 일거에 상벌을 내렸으니 만천과해지계(瞞天過海之計)를 활용하는 방법 중에서 최강수(最强手)를 쓴 것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이 계책을 깨뜨리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복잡한 정치투쟁에서는 이러한 측면을 잘 고려하여 이 계책을 사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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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2/26 [11:32]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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