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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육계, 제1계 만천과해(瞞天過海)를 활용사례(3)
 
서상욱 역사가 기사입력  2007/02/26 [12:26]

 

묵계 서상욱님은 해박한 동양의 역사와 주역, 의서에 통달한 분으로 현재 대학교 강사 및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동양 고전과 역사 및 철학에 조예가 깊다.

만천과해(瞞天過海)를 활용하는 세 번째 수법은 예봉(銳鋒)을 감추어 자신을 보전하는 동시에 전력을 기우려 성공해야 하는 것이다.

중국 고대의 관계(官界)에서 펼쳐졌던 정치투쟁 중에서 예봉(銳鋒)이 드러나 모든 사람들이 야심(野心)을 알게된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을 불안하게 하여 시기(猜忌)하고 방비를 하기 위하여 선수(先手)를 쓰게 되므로 스스로를 사지(死地)에 빠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뜻과 야심(野心)은 물거품이 되고 생명마저 위태롭게 된다.
만천과해지계(瞞天過海之計)를 사용할 때는 철저하게 자기의 예봉(銳鋒)을 감추고 정적(政敵)을 기만(欺瞞)해야만 최종적으로 자기의 뜻과 야심(野心)을 이룰 수가 있다. 사람들에게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때로는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인 척, 때로는 결함이 많은 사람인 척하여 자기를 가볍게 보고 대비를 하지 못하게 하고, 정적이 자기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진왕(秦王) 영정(嬴政)은 호시탐탐 육국(六國)을 노려보다가 한(韓)을 핍박하고, 조(趙)를 없앴으며, 연(燕)을 깨뜨리고, 위(魏)의 항복을 받은 후에 초(楚)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영정(嬴政)은 먼저 장군 이신(李信)에게 초(楚)를 평정하려면 얼마의 군사가 필요한 지를 물었다. 이신(李信)은 역전의 용장으로 수많은 전공을 세웠고, 적을 경시하는 마음을 드러내며 큰소리를 쳤다.

“20만이면 됩니다”

영정(嬴政)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노장(老將) 왕전(王翦)을 불러서 물어 보았다. 왕전(王翦)은 지략이 많은 사람이었으므로 여러 가지를 가늠해 본 후에 이렇게 말했다.

“60만명이 아니면 불가합니다”

60면명은 당시 진(秦)나라의 전군을 동원해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영정(嬴政)은 당연히 곤란하다는 생각을 하고 왕전(王翦)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군도 이제 늙었구려. 겁을 내다니!”

그리고 이신(李信)과 몽염(蒙恬)에게 20만명을 주어 초(楚)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왕전(王翦)은 자기의 의견이 채택되지 못하자 영정(嬴政)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 병을 핑계로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신(李信)과 몽염(蒙恬)은 초전(初戰)에 승리를 거두어 깊이 쳐들어갔다가 역공을 당하여 7명의 도위(都尉)를 잃고 대패하고 말았다. 패전소식을 들은 영정(嬴政)은 크게 후회하고 친히 왕전(王翦)의 고향으로 찾아가 이렇게 정중하게 말했다.

“과인이 장군의 판단을 다르지 않았기 이신으로 하여금 찬피를 당하게 하였습니다. 장군이 비록 병이 들었지만 과인을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왕전(王翦)은 병이 들어서 불가능하다고 사양했다. 영정(嬴政)은 왕전(王翦)의 말을 듣지 않고 다시 이렇게 말했다.

“이미 결정된 일이오. 다시 말하지 마시오”

왕전(王翦)은 거듭 사양을 했지만 왕명을 거역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

“신을 반드시 기용해야 하신다면 60만명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영정(嬴政)은 허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60만 대군이 출정을 할 때 영정(嬴政)은 친히 함양(咸陽)에서 50리가 떨어진 패상(覇上)으로 나아가 환송을 하였다. 출정하는 길 위에서 왕전(王翦)은 영정(嬴政)에게 다시 한 번 좋은 땅과 아름다운 집을 줄 것을 요청하여 영정(嬴政)으로 하여금 자기의 요구가 과분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과연 영정(嬴政)은 이렇게 말했다.

“군대를 이끌고 가는 길에 어찌 가난을 걱정하는가?”

왕전(王翦)은 평범한 소시민인 척하면서 다시 한 번 차근차근 다지듯이 말했다.

“대왕께서는 제가 공을 세우면 저를 제후로 봉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땅과 집을 저의 후손들에게도 주신다는 약속을 하십시오”

영정(嬴政)은 왕전(王翦)이 따지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웃었다.


왕전(王翦)은 군대를 이끌고 출정을 하면서 끊임없이 영정에게 사신을 보내서 전택(田宅)을 요청하였다. 무려 다섯 차례나 사자(使者)를 보내자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왕전(王翦)에게 물었다.

“장군이 대가를 구걸하는 것 같아서 너무 심합니다”

왕전(王翦)이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지 않다. 대왕은 마음이 조악하여 임무를 맡긴 사람을 믿지 않는다. 지금 나라안의 모든 군사가 나에게 있기 때문에 내가 자손을 위하여 전택(田宅)을 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으면 반드시 생각하면 할수록 나를 의심하게 된다”

왕전(王翦)은 이렇게 하여 영정(嬴政)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 영정은 왕전이 정치적 야심은 없고 이익을 탐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고 마음이 놓였다. 그러므로 왕전(王翦)은 일거에 초(楚)나라를 멸망시키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가 있었다. 그는 자신은 물론 후손들까지 음덕을 입게 되어 손자 왕리(王離)가 진이세(秦二世) 때까지 장군으로 존경을 받게 하였다. 진(秦)이 전국을 통일하고 조고(趙高)가 권력을 잡자, 공신(功臣)들과 숙장(宿將)들이 살해당했을 때에도 왕전(王翦)의 일가는 피해를 입지 않았으니, 이것은 왕전(王翦)의 선견지명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왕전(王翦)의 성공은 만천과해지계(瞞天過海之計)를 운용하여 자신의 예봉(銳鋒)을 감출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봉(銳鋒)을 감춘다는 것은, 겉으로는 다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투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다. 이것이 만천과해지계(瞞天過海之計)의 특징이다.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이 아직 황제로 등극하기 전에 어떤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공은 골상이 비범하여 반드시 군왕이 될 것입니다. 스스로를 아끼고 이 말을 잊지 마십시오.”

이연(李淵)은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서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렇기 때문에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에게 미움을 받았다. 이렇게 되자 이연(李淵)은 즉시 책략을 바꾸어 술에 빠지고 뇌물을 탐하여 그 흔적을 숨겼다. 양광(楊廣)을 속여서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하게 하고 미움을 받지 않아서 수(隋)나라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태원유수(太原留守)가 되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권력을 탈취하고 황제가 되었다. 자료가 없어서 이연(李淵)이 양광(楊廣)을 어떻게 속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을 알지는 못하지만 명조의 가정년간에 벌어졌던 하언(夏言)과 엄숭(嚴嵩)의 정치투쟁은 이러한 상황을 생생하게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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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2/26 [12:26]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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