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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운스님의 '오늘의 법문'(法門)[121]
가야산과 해인사의 인연에
 
제운스님 객원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9/06/25 [11:09]

 

▲     © 제운스님 객원칼럼니스트

 


가야산과 해인사의 인연에
    
    
가야산정 伽倻山頂
명호중원 名號中元
동남길지 東南吉地
법보장존 法寶藏存
백간화실 白幹花實
홍류선흔 紅流仙痕
삼송우경 杉松優競
차별곤륜 此別崑崙
    
가야산 머리에 서면
명산 중의 명산이라
동남의 길지요
법보가 상존하고
태백 줄기의 꽃과 열매라
신선이 노니는 홍류계곡
솔과 삼나무가 우월을 다투어
이곳이 곤륜의 별지로세.
    
가야산은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이어져 덕유산을 이루고 본줄기는 지리산을, 또 다른 줄기가 대덕산과 수도산을 거쳐 가야산을 이루었다. 동남으로는 낙동강의 본류인 황강(黃江)을 굽어보며 정상(象王峰)에 올라서면 서쪽으로는 덕유산, 남으로는 지리산이 보인다. 정상을 이루는 뾰쪽한 암석(石火星)이 불꽃이 어우러진 것 같은 아름다운 명산으로 홍류동(紅流洞)계곡이 수십 리에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이러한 명지에 해인사가 있다. 해인사는 서기 766년(혜공왕 2년)에 순응(順應)에 의해 창건된 절이다. 우리나라 3보 사찰 중에 하나로 법보(法寶)에 속한다. 법보란 진리의 보배라는 뜻으로 팔만대장경이 모셔져있기 때문이다. 해인사가 명찰이라면 가야산 역시 명산이다.

 

사람들 입에서 해인사가 유명한 건 가야산이 있기 때문이라 하고 가야산이 유명한 건 해인사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해인사가 창건된 이레 7번의 대화재가 있었지만 보고 중의 보고라 할 수 있는 팔만대장경이 화마로부터 보전될 수 있음을 생각하면 가야산은 명산이요, 명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설사 화마를 피했다할지라도 나무로 조각한 경판이 잘 보존 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면 어찌 오늘처럼 경판이 보존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봐도 답은 명산이요 명지요 길지다.
    
해인사와 나의 인연 또한 깊다. 1972년 6월에 해인사로 입산출가 했기 때문이다. 출가 전날 밀양 단장의 관음사에서 하루를 유숙하는데 그날 밤 용이 하늘을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관음사는 양산통도사의 말사로 신행(信行)스님이 주지로 있었고, 행자(행자. 예비승)가 있었는데 그날 밤 행자와 함께 잤다.

 

꿈속에서 함께 잠잤던 행자와 절 도량을 서성이다 눈에 뱀이 보였다. 내가 행자에게 뱀을 보라고 가리키는 순간 뱀이 하늘로 승천을 하는데 그 길이가 20m정도로 보였고 몸 중간에서 앞머리 사이로 발이 보였다. 용꿈을 꾸고서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는 곧장 해인사를 향했다.

 

당시에는 가진 것은 빈 몸에 허름한 작업복 밀짚모자와 작은 가방이 전부였다 해인사를 가기 위해서는 고령을 향해 걸었다. 고령을 지나 해인사에 이르러 종무소에 들리니 종무소의 소임(所任) 스님이 나에 대해 묻고 답하는 중에 팔만대장경을 다 읽고 알지 못하고서는 아는 체 말라 했다.

 

생각을 해보면 스님의 자만심과 자긍심이 같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해인사에 행자로서 잠시 머물다가 팔공산 동화사에 경산(京山)스님이 문무관(門無關. 도봉산 천축사에 있는 특별 선원. 한번 들어가면 6년 동안 문밖을 나오지 못함)에서 5년의 수행을 마치고 동화사로 와계신다는 소식에 곧바로 동화사로 왔고 그해 경산스님을 스승으로 득도수계를 했었다.
 
나는 수행자며, 문인승으로서 해인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문인이 있다. 그는 12살에 서라벌을 떠나 지금의 서해바다에 작은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유학을 했던 고운(孤雲 崔治遠 )선생이다. 그가 중국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공부를 하다가 24살에 중국에서 벼슬을 얻어 생활하다 28살에 신라로 돌아와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이어 전라도 태인 태수 등을 거치며 살아가다가 41살 되던 해에 벼슬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가야산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 후로는 뚜렷한 기록이 없지만 삼국사기 택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서 간접적으로 기록을 추정해볼 수 있는데 서기 904년 그의 나이 47살 때 해인사 화엄선원에 은거하면서 법장화상전 부석존자 등을 집필한 기록이 있다. 그 뒤로 몇 년 후 51살 이후 그의 행적이 묘연했다. 그는 삿갓과 신발을 남겨둔 채 행적이 끊어졌다. 훗날 해인사 스님들이 그의 영정을 그려놓고 그를 추모했다고 전한다.
 
최치원은 신라의 대 문장가로 원효의 아들 설총과 함께 추앙받는 인물이다. 다만 그의 호 고운(외로운 구름) 해운(海雲. 세상의 뜬구름)이 말하듯 세상살이가 힘들고 외로웠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외로움을 많이 가지지 않았나 하는 짐작을 해본다.

 

외로움이란 같은 상황에서도 외롭게 받아드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그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12살 어린 나이에 풍랑이 심한 큰 바다 작은 배에 몸을 실어 타국으로 간 것도, 타국에서 유년생활 중에 4년간이나 전쟁에 참여해 목숨을 부지했던 일, 타국에서 작은 벼슬을 얻어 살아가야 한 일, 고국에 돌아와 치열한 삶의 연속이 그를 외롭게 할 수도 있겠다는 짐작이 든다. 그가 남긴 대표적 시 한편을 들어보자
    
추야우중(秋夜雨中) 가을 밤 비 내리는 가운데 
    
추풍유고음 秋風惟苦吟
세로소지음 世路少知音
창외삼경우 窓外三更雨
등전만리심 燈前萬里心


가을바람이 괴로워 읊어본다
세상은 나를 몰라주는데
밤은 깊어 창밖에 비가내리고
등불 앞 마음은 만리를 달린다.
 


제운스님/시인 선화가

해인사 출가, 동화 법주 범어 통도사 등 수행
문인화가, 평론가 석도륜 선생 사사
개인전 : 서울경인미술관, 양평친환경박물관 등 4회

저서 : 너는 금생에 사람노릇 하지 마라, 달마산책, 오가밥상,
그대 안에 수미산도 다 놓아버려라, 채근담, 산사의 주련,
내 마음의 이야기, 그대 마음을 가져오라, 나를 찾아 떠나는 선시여행,
산문의 향기, 당신은 나에게 무엇입니까, 시선일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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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6/25 [11:09]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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