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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학 칼럼] 5·18은 헌법 근처에도 가지 말라
김대중의 과도한 집권욕에서 촉발된 무장시위가 발단 5·18을 정치적 나락으로 끌고 가는 자들에 분노 있어야
 
정재학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24/01/07 [14:13]
▲ 정재학 시인·칼럼니스트   

5·18을 헌법에 싣는다는 맹랑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것이 곧 현실화 되리라는 급박한 목소리도 들린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당시 80년대 광주에서 대학 3년생이었던 필자는 현장에 있었다. 비록 끝까지 동행하지는 못했지만, 일부분 현장의 목격자로서 부끄러울 것 없이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기억 속의 5·18은 지극히 아름답지 못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권력 공백기에서 김대중의 과도한 집권욕에서 촉발된 무장시위가 발단이었지만 도저히 우리나라 국민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정체불명한 청년들의 과격한 무력시위와 이를 진압하려 출동한 국군이 국민을 처참하게 때리고 짓밟는 장면, 그리고 분노한 시민들의 고함소리는 아직도 우울한 한 폭의 정물(靜物)이 되어 있다.

 

곤봉이 내리꽂히던 어느 대학생의 머리에 솟구치는 피는 어김없이 붉었다. 가식이 침범할 수 없는 진한 색깔의 핏빛이었다. 거기에 한 방울 눈물과 위로가 섞인다 해서, 조금이라도 희석될 수 없는 너무도 선명한 비극의 빛깔이었다.

 

무수한 소리들이 있었다. 분노에 찬 고함소리들, 뒤를 이은 총소리와 예비군 무기고 탈취,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몰고나온 장갑차, 교도소 습격, 전남도청 점거 그리고 진압. 도청 마당에서 울려오던 진압을 끝낸 계엄군의 군가소리도 들었다.

 

그날 이후 40년 이상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진실은 스스로 정체를 감추지 않는다. 그냥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진실은 거짓의 도움을 원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도 진실일 뿐 어떤 꾸밈도 바라지 않는다. 진부한 수식의 어구로 찬양하지 않아도 좋다. 가식과 허구가 동원된 진실은 더이상 진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5·18은 정치의 손아귀에 있다. 그리하여 5·18이 필요한 자들에 의해 가공되고 재구성된 줄로 안다. 쉽게 말하면, 그것은 정치적 도구로 변질되어, 오염되어 누군가의 무기가 되고 신앙이 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다시 본질의 관점에서 5·18을 바라보아야 한다. 오래도록 빛바랜 사진 속 뇌리에 담아둔 5·18광주를 기억 그대로 바라본다. 그날의 사진 속엔 총을 든 시민들이 있었고, 계엄군과 시민군이 울리는 총소리가 있었다.

 

그 어떤 미학(美學)으로도 덮을 수 없는 진실은 총이었고 총소리였다.

 

그 총소리가 민주화운동이었다면, 그 시대를 지배하면서 잔인한 통치를 행사하는 독재자가 있어야 한다. 대부분 전두환 신군부의 정권찬탈을 말하겠으나 1980년 봄 당시 우리는 전두환의 이름도 몰랐다. 전두환은 1979년 10월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제거할 때 인근에 있었던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등을 수사하기 위해 체포한 12월12일에 등장했을 뿐이다. 1980년 봄 대한민국 대통령은 최규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 혼란을 일으킨 주체에 대한 의문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대통령 최규하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백번을 생각해도 시위가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물불을 가리지 않은 극렬한 데모였다.

 

따라서 민주화운동과 무장봉기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5·18을 향해 해묵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대질문= 5·18은 민주화운동인가

 

이 대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몇 가지 소질문을 모아본다.

 

▲소질문1. 시위 집회는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가

 

광주에 공수부대가 온 것은 당시 들불처럼 번지던 학생 데모 때문이었다. 그러나 광주의 상황은 평온하였다. 흔한 이름으로 ‘데모’라 불리우던 데모크라시(Democracy)였고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정당한 정치적 행위였다. 당시 광주는 공수부대가 올 곳이 아니었다.

 

서울은 극심하여 시내버스가 불태워지던 시절이었다. 광주는 도청 앞 분수대에서 촛불을 든 평화로운 집회였을 뿐이다.

 

왜 전투력 강한 공수부대가 광주로 왔느냐는 의문은, 후일 정호용이가 특전사사령관이었음을 알고 풀어졌다. 전두환의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이 휘하의 병력을 동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위집회가 없었다면 공수부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시위집회의 주최자였으며 배후자였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당시 전남대와 조선대는 교내시위로 어용교수를 공격하고 있을 때였고, 다른 여력이 있을 수 없을 때였다. 이 에너지를 밖으로 끌어낸 것이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이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김대중이 있었다.

 

당시 김대중은 신군부 출현에 위기를 느끼고 박관현을 불러 시위집회를 당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데모와 시위집회를 통해 소요(騷擾)를 야기시켜, 민중을 등에 업고 박정희가 사라진 대한민국의 차기 정치권력을 얻고자 함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도청 분수대 앞에서 진행된 광주학생들의 시위집회는 김대중이 정권 획득을 목적으로 동원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절대로 순수 민주화운동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소질문2. 현장 발포는 누구에 의해 지시되었는가

 

광주시민들의 분노로 인해 공수부대원들은 도청 앞에서 포위되어 있었다. 위기에 몰린 공수부대원들은 여차하면 발사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때 시내버스 2대가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한다. 총소리는 그 직후 들린다. 누가 지시할 것도 없이 위기가 불러온 개인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발포 지시는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현장의 위기에서 판단은 현장지휘관의 몫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소질문3. 무기고 탈취는 정당한가

 

시위가 과격해지기 직전 전남 도내 예비군 무기고 46개가 열리고, 많은 양의 칼빈과 M1소총이 탈취되었다. 1970~80년대 군복무를 한 사람이면 누구나 익숙한 무기였다. 당시 M16은 전방부대에서나 다루던 무기였다.

 

문제는 군복무를 하지 않은 시민들에게도 무기가 들려졌다는 점이다. 그 시민들 중에는 조선대 운동장 배수로에 살던 넝마주이들과 황금동 조폭들도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질문4. 칼빈과 M1에 의해 죽은 시민들은 누구에 의해 사망한 것인가

 

수많은 죽음의 진실 속에는 상당수의 죽음이 M16이 아니라, 탈취된 칼빈과 M1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5·18 각색론자들은 이 점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므로 총이 뭔지도 모르는 자들이 아무렇게나 발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광주사회 하층을 살았던 소외계층과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회 불만자들이 총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진압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격발시키지 못하도록 총의 공이를 빼버린 계엄군의 공작 후에도, 무력화된 총을 그대로 들고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공이(firing pin)가 무엇인지 몰랐다는 의미다.

 

▲소질문5. 왜 총기 반납을 거부했는가

 

사태가 걷잡을 수 없도록 진행되자 광주 유지들은 총기 반납을 선도하였다. 총만은 내려놓자는 것이 지역 유지들의 뜻이었다. 총기 무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던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이에 호응했고, 끝까지 남은 것은 소수였다.

 

대부분 넝마주이 등 사회 저층민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5·18묘역에 지금도 남아있는 신원 미상의 무연고 인물들이다. 이들을 놓고 북한 특수부대원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지만, 필자는 그들이 가족 없는 부랑자나 넝마주이들이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리고 5·18 이후 조선대 운동장 배수로에 살던 넝마주이들은 모두 사라졌다. 석양녘이면 넝마주이들이 밥 짓는 연기가 솟아오르던 조선대 운동장. 못 배우고 부모 없이 버림받고 살던 그들도 우리와 함께 분노했던 따뜻한 가슴을 지닌 우리의 형제들이었다고 믿고 싶다.

 

▲소질문6. 교도소 습격도 민주화운동인가

 

도청을 점거하고, 행정이 마비된 혼란 속에서 일단의 무리가 교도소를 습격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무려 5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교도소 습격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신군부의 음모라는 것이다. 이는 5·18의 정당성과 신성성(神聖性)을 유지하기 위한 비열한 각색이라 보아야 한다. 교도소 인근에 살던 주민들마저 속일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내가 아는 한 북한군 침투는 없었다’고 잘라 말한 전두환 대통령이 교도소 습격을 허위로 꾸밀 까닭이 없다. 그래서 필자도 5·18 혼란을 가중시킨 자들은 제5열(第五列·fifth column·국가나 도시 등 보다 큰 공동체의 내부에서부터 형성되어 그 기저에 암약하는 존재)의 작용이라 말하는 것이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사상범, 쉽게 말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추종하던 간첩들이 대거 수감되어 있었다. 만약 교도소가 장악되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겠는가.

 

필자의 추궁에 누군가는 이렇게 답하였다. ‘혁명의 시기에는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 사람은 마르세이유 교도소를 습격했던 프랑스대혁명을 연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광주교도소 사상범들은 독재에 의해 탄압받던 인물들이 아니라 미전향장기수나 남파 간첩들이었다. 이들을 풀어줄 목적으로 교도소로 진격했다면, 5·18이 민주화운동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소질문7. 도청 진압이 잘못된 것인가

 

전남도청은 전남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전남의 심장이다. 전라남도 전체에 예산과 공무원의 헌신을 제공하는, 혈액을 공급하는 심장과 같은 곳이다. 도청이 시민군에 의해 점령되어 모든 행정이 멈추었다는 것은 전남의 심장이 멈춘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정부나 국가는 단연코 없다는 것이다. 누구든 하루라도 빨리 이 상황을 종식시키고, 행정과 치안을 복원하려 했을 것이다.

 

이에 마침내 도청에 계엄군이 들어가면서, 5·18은 비극의 막을 내린다. 박지원의 말대로 ‘위대한 결단’이었을지 모른다. 따라서 공권력의 도청 진압에 다른 말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이 비극은 오늘날까지 이용되어 반(反)정부투쟁의 상징이 되었고, 진실은 각색되어 전설이 되고 소설이 되어갔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이라는 꽃다운 이름의 허구(Fiction)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5·18은 더불어민주당의 전유물이 되어, 주사파로 정체가 확연히 드러난 자들이 민주화유공자가 되었다. 광주가 어떻게 생긴 지도 모르는 자들 중에는 한명숙도 이해찬도 설훈도 있다.

 

5·18 유공자 일시 보상금이 1990년대 말에 3억 원이라 하면, 지금 가치로는 30억 원이 넘을 것이다. 거기다가 매달 주는 보상금은 또 얼마인가. 그리고 취업부터 의료·교육·취업 우대까지 부수적으로 따르는 국가혜택은 또 얼마인가.

 

그러나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이 주는 혜택임에도 국민 모르게 공적은 물론 명단마저 숨기는 짓은 또 무엇일 것인가.

 

5·18을 이용하여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고, 5·18을 이용하여 보수정권과 애국우파를 공격하고, 5·18을 이용하여 호남을 좌익으로 끌고 가는 정치적 반역행위에 우리는 분노한다.

 

▲소질문8. 5·18 유공자 선정은 국가가 하는가

 

답은 ‘전혀 아니다’이다. 광주시가 지명한 몇몇 인사들에 의해서 선정된다. 이름하여 보상심의위원회. 그러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고, 두 사람의 인우보증서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해찬 말대로, 광주에 한 번 와보지 못한 인물도 5·18을 옹호하거나 두둔하는 ‘내 편’이라면, 그 자가 누구든 유공자가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가보훈부는 관여할 어떤 자격조차 없다. 심지어 명단 공개를 추궁할 수조차 없다. 그럼에도 보상만큼은 빠짐없이 뒷바라지 해줘야 한다.

 

중공군 정율성공원을 만든 강기정이가 광주시장으로 있다는 사실을 잠시 생각해본다. 그 강기정이가 공적심사를 맡는다? 과연 누가 5·18 유공자가 되겠는가.

 

이제 유공자로 선정된 인물들이 거의 다 드러났지만, 그러나 광주시 5·18심사위는 유공자가 된 인물들이 유공자로 선정된 사유를 밝히지 못한다. ‘이유 없는 민주화유공자’들인 것이다.

 

▲소질문9. 북한 혁명열사릉에 모셔져 있는 5·18 관련 인물들은 누구인가

 

북한 혁명열사릉의 묘비에는, 그들이 5·18 당시 남한으로 침투하여 죽은 공로를 인정하여 모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름과 소속까지 기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북한이 위대한 공산혁명가들만 모셨다는 혁명열사릉이다. 여기에 북한이 가짜를 모셨다고 보는가?

 

▲소질문10. 5·18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된 정치계 인물들과 광주시장, 그리고 공적심사위원 전원을 고소하면 어떻겠는가

 

작당모의라는 말이 있다. 여럿이 패를 이루어 범죄를 의논하고 범행을 실행하는 짓을 말한다. 5·18에 덧칠하여 작당하여 꾸미고, 특별법을 만들어 비판을 막아 입을 봉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에 대해, 우리는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5·18을 사랑한다면, 5·18을 정치적 나락으로 끌고 가는 자들에 대한 분노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응분의 처단도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 지나친 혜택과 유공자 선정 문제를 법정에 세운다면, 5·18은 조금씩 맑아지지 않겠는가.

 

80년 그날 이후, 거의 반세기가 흘러간 지금, 5·18은 역사 속에서 안식을 맞이해야 한다. 더 이상 그 누구도 5·18에 기생(寄生)해서는 안 된다. 그 순혈했던 핏빛만큼 5·18은 미래에도 영원히 순결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작은 희망이다.

 

▮대결론: 5·18은 헌법 근처에도 가지 말라

 

우리가 3·1독립운동을 민족사적 절대의 가치로 바라보며, 그 뜻과 정신을 기리는 이유가 있다. 독립을 향한 뜨거운 애국애족정신 또한 비길 바 없는 위대함이지만, 그러나 더 큰 위대함은 비폭력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오직 태극기만 들었고, 오직 독립을 요구하는 뜨거운 목소리만 있었다. 끌려가서 모진 매질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대한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향해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을 뿐이다.

 

만해 한용운은 기미독립선언문 말미에 공약 삼장을 덧붙인다. 그 내용이 바로 비폭력이었다. 그리하여 3·1운동은 세계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립운동이었고, 우리 민족의 영원한 자랑이 되었다.

 

마하트마 간디의 위대함도 식민지 인도인의 무저항 비폭력의 정신이었다. 온갖 탄압과 감옥생활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이 위대함에, 대영제국이 무릎을 꿇었다.

 

넬슨 만델라도 이 평화의 힘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통합시켰다. 백인통치가 남아프리카에서, 어떤 흉악무도한 족적을 남겼는지 모르는 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만델라는 무기를 들지 않았다. 무기를 선동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은 박관현에게 시위집회 즉 데모를 지시하였다. 그런 자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반면 조국근대화를 이끌며 온갖 신고(辛苦) 끝에 5000년 가난과 빈곤을 이겨낸 영웅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자가 되었다.

 

4·19학생의거 속에도 비폭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정치깡패들에게 맞고, 박영주가 지휘하는 경찰의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폭력을 무기화하지 않았다.

 

5·16혁명에도 총은 있었지만 피는 없었다. 무혈혁명이었다. 혁명군은 국민과 장면 총리와 그 휘하 인물들에게 피를 요구하지 않았다. 장면은 권좌의 자리에서 도망쳐 수녀원에 숨어 몸을 피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5·18의 진실은 총소리에 있었다. 괴한들의 무장 시위와 계엄군의 잔혹한 시위 진압, 시민군이라는 이름의 무장한 청년들이 국군과 시민을 향해 총을 쏘고, 시민을 보호하던 경찰관을 죽이고, 행정마저 마비시킨 무장투쟁. 그것은 분명 총소리였고, 폭력을 확대 재생산시킨 또 다른 폭력이었다.

 

더 깊은 본질에는 교도소를 습격하여 사상범·간첩들과 죄수들을 사회에 풀어주고자 한 반역(叛逆)이 있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분명 북한의 직접 지시를 받은 남파간첩이나 남로당 계열 제5열의 존재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후안무치하게도, 더불어민주당 인사들 특히 주사파 세력이 민주화유공자로 둔갑한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5·18특별법을 만들어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는 또 무엇인가.

 

5·18은 정신적으로 광주를 ‘주사파 해방구’로 발전시킨 운동이었다. 민주화유공자? 묻자. 여기 민주화유공자 속에 민주당 출신이 아닌 애국우파 인사가 몇 명이라도 있는가. 순수 광주시민을 제외한 대부분이 주사파 아니면, 자생간첩으로 의심되는 더불어민주당 사람들이 아니던가.

 

바로 이 자들, 5·18을 위대한 민주화운동으로 가공(加工)한 자들이, 5·18을 헌법에 올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을 둔갑시켜 마르고 닳도록 5·18을 이용해 먹으려는 속셈일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5·18이 헌법에 수록되는 그 시작점은, 바로 올 4.10 총선 이후의 일이라고 하였다. 총선 승리를 염두에 둔 정치적 계산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5·18을 헌법에 싣는다는 것은, 국가의 정신적 근간을 바꾸는 일이다. 총기를 든 무장봉기를 허용한다는 것이니, 북한의 지시를 받은 민주노총의 반정부투쟁, 더불어민주당의 사주(使嗾)로 대통령 탄핵에 나선 사람들은, 누구나 무기고를 털어 총기로 무장해도 좋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총기 무장 봉기라는 전(前)근대적 야만의 정신을 대한민국 헌법에 싣는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3·1독립만세를 외치며 순국한 선열들을 앞에 두고, 감히 폭력과 선동을 합법화시키고자 한다?

 

대한민국은 헌법 위에 세워진 탑이다. 우리는 이 탑 위에 태극기를 날리며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5·18이 있어야 할 곳은 헌법이 아니라, 5·18추모공원이다. 정치적 이(利)를 탐하는 부정한 눈으로 함부로 헌법을 조롱하지 말라.

 

시인 변영로는 시(詩) ‘논개’에서 강낭꽃보다 더 푸른 넋을 노래하였다. 그렇듯 강낭꽃보다 더 푸른 서러움이 영산강 극락교 아래로 흘러간다. 저 푸르름 속에서 부탁하노니, 더 이상 5·18을 더럽히지 말아다오.

 

필자는 5·18을 두 눈으로 현장에서 확인했던 전라도 사람이다. 또한 이 비극적인 장면을 영원히 가슴에 담고 노년(老年)을 살아가는 촌사람, 전라도 마을의 백성이다. 이 가련한 전라도 사람이 5·18에 대해서 한 마디를 남긴다.

 

“5·18은 헌법 근처에도 가지 말라!!!”

 

2024. 1. 4.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


 ♦외부 필진 칼럼은 본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자유논객연합 부회장, 시인, 자유지성300인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자유교원조합 중앙고문, 국가유공자, 데일리저널 편집위원, IPF국제방송 편집위원, US인사이드월드 편집위원, 전추연 공동대표
현재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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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4/01/07 [14:13]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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