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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지, 텅 빈 유적에 국보급 문화재만 덩그러니 남아
영남불교문화원연구원 삼국유사유적답사회 탐방기①고달사지옛절은 사라지고 이상한 모양의 조그마한 절집 생겨
 
박익희 기자 기사입력  2009/04/21 [15:51]

지난 19일 봄기운이 지나고 벌써부터 여름이 온 것같이 날씨가 덥다. 밀양지방에 31℃ 기온이라니 날씨가 미쳤나 보다. 대구지방은 신록이 시작되고 있다
 
영남불교문화원연구원 김재원 원장의 인솔 하에 ‘제27회 삼국유사문화유적 답사’를 떠나는 날이다. 약속 장소에는 꽃피는 계절을 놓칠 새라 관광버스 행렬이 줄을 서있다.

 

▲  원종대사 혜진 탑비의 귀부 및 이수( 보물 제6호) 나침판으로 방향을 점검하고 있는 김재원 원장    © 박익희 기자


차에 오르니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보현암에서 금방 쪄서 보내온 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백설기는 조반을 놓친 나의 위를 든든하게 했다. 박기옥 부회장님이 디자인했다는 예쁜 목걸이형 표찰을 목에 거니 괜히 목에 힘이 들어가고 기분이 우쭐해진다. 일종의 완장효과인 것 같다.

26쪽의 묵직한 답사 자료를 받아드니 반가움에 앞서 먼저 기가 질린다. 자주 나오지 못해 죄송하다며 버플러를 기증하신 분은 사용법까지 시범을 보여 가면서 설명하신다. 출발부터 야릇한 흥분이 차안을 가득 채웠다.

▲  고달사의 수조, 아마도 사찰의 규모가 커서 돌로 만든 물담는 수조 또한 크다.  ©박익희 기자


지금 우리들이 달리고 있는 중부내륙고속도로는 옛날의 영남대로 3개 길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호한 중로에 해당한다고 한다. 경부고속도로는 일제가 효과적인 약탈을 위해서 설계 개설한 경부선 철도를 따라 놓았기 때문에 옛날의 영남대로보다 58km나 둘러 가고 시간적으로는 평균 30분 이상 더 걸린다고 한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대구지역 사람들은 서울 나들이를 할 때 중부고속도로를 많이 이용하는 것 같다.

옛날 선비들은 추풍령을 넘어야하는 서로는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해서 피하고 죽령을 넘어야하는 동로는 죽죽 미끄러진다고 싫어하고 새재를 넘어가는 중로는 새소식을 전해준다고 해서 떼거리로 넘었다는 영남중로의 새재, 지금 복사꽃이 한창이다.

험악한 백두대간 기슭을 연분홍으로 수놓은 복사꽃밭 속을 달리는 기분은 마치 개나리봇짐에 미투리를 달랑거리며 새재를 훠이훠이 넘어가는 선비의 모습 같이만 느껴진다.

▲  불상 석대좌(보물 제8호), 높이가 157cm이며 대좌위에 철불을 모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2층 누각으로 건물을 지은듯 주춧돌이 남아있다   © 박익희 기자


 옛날 상주에 속했다는 새재를 버스가 긴 터널을 통과하니 충주다. 충주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국경지대여서 이른 시기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백제의 근초고왕이 넓혀 놓은 땅이었으나 고구려 장수왕이 빼앗아 국원이라 했던 것을 다시 신라가 차지해서 국원소경으로 삼았다는 곳.

고려 태조 왕건도 얕볼 수 없어 이곳 호족의 딸과 혼인하고 충주라 했다는 전략적 요충지라 한다.

▲ 고달사지 부도 (국보 제4호), 돌로 만든 걸작품이다    © 박익희 기자


  여주 땅에 들어서니 지금까지의 지세와는 사뭇 다르다. 남한강은 오대산 우통수에서 발원한다. 우통수 물은 다른 물과 섞이지 않고 흐른다는 남한강변의 도시 여주는 부르는 이름도 많다.

고구려 때는 골내근현, 신라 때는 황효, 고려 때는 황려, 여흥 조선 예종 때 세종의 장릉을 천장해 오자 여주라 했다고 한다. 고려 때 황룡마와 여룡마가 날뛰어 사람들이 살 수 없게 되자 인당 도사가 두 용마에게 굴레를 씌워 순치시켰다는 전설을 김재원 원장은 황룡마는 홍수 때 넘쳐흐르는 황토물이고 여룡의 여는 검은 말인데 평상시 물이 깊어 검푸르게 보이는 물을 일컫는다고 해석하면서 굴레를 씌웠다는 것은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고 물을 잘 활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고개가 끄덕여 지는 탁견이다.

첫 답사지, 고달사지는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 기슭에 있다. 옛 사찰은 없어졌으나 약 1ha(3000평)나 되는 넓은 땅에 남아있는 수조 2개와 국보1개와 보물 4개는 이 사찰의 규모를 실증적으로 증명하지만 전해오는 전설은 더욱 가관이다.

한 수 배우려는 스님들과 법문을 들으려는 신도들이 얼마나 모여들었는지 신에 들어붙은 흙을 털어낸 것이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그 산을 <신털이산>이라고 한다는데 어느 산인지 도대체 구분이 안 된다.

▲   고달사지 부도에 새겨진 교룡들, 힘이 있고 금방이라도 살아서 승천할 기세이다   © 박익희 기자


원종대사혜진 탑비귀부 및 이수 (보물 제 6호)의 크기와 돌에 새겨진 귀체용두(龜體龍頭)는 석공의 공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금방이라도 용이 입을 벌리고 덮칠 것 같다. 비문은 8조각이 난 채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고 한다.

전액 부분에는 유일하게 귀면이 조각되어 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용이라고도 하고 어떤 분은 치우라고도 한다는데 김 원장은 그리스의 ´고르곤´이 인도로 와서 힌두교의 ´끼리티무카´와 결합하고 이것이 불교에 묻어 우리나라까지 전래된 것으로 보고 옛날 사람들이 불렀던 귀면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 원종대사혜진 탑(보물 제 7호), 원종대사 혜진 부도를 설명하는 김재원 박사. 목을 뺀 용의 모습이 특이 하다    © 박익희 기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불상석대좌(보물 제 8호)는 높이가157㎝나 된다. 이 대좌 위에는 아마 그 당시에 유행했던 철불를 모셨을 것으로 김 원장은 추정한다. 주위에서 발견된 주춧돌들의 위치로 봐서 바깥에서 보면 2층 안은 통층으로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구조라면 안의 불상은 장육상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 한다.

고달사지부도(국보 제 4호)와 원종대사혜진 탑(보물 제 7호)
유명을 달리했지만 고승대덕의 명성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살아있는 교룡들의 몸짓이 고달사지 부도에 그대로 남아 있다. 서쪽의 부도가 국보이고 동쪽의 부도탑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국보인 서부도는 혜목산 고달사를 개창한 원감현욱 스님의 부도탑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현욱 스님은 병부시랑을 지낸 김염균의 아들로 태어나 헌덕왕 6년(824)에 당나라에 가서 마조도일의 제자인 장경의 법을 받아 희강왕 2년(837) 가을 돌아와 지리산 실상사에 머무니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이 잇달아 제자의 예를 다하여 공경하였다고 설명한다. 4년 뒤에 혜목산으로 들어와서 토굴을 지었으나 경문왕이 고달사를 지어 주석케 하면서 향, 옷, 등을 수시로 공양했다고 한다.

82세에 돌아가시니 휘하에는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 중에 구산선문 중 봉림산문을 개설한 진경심희 스님이 있다. 심희 스님은 진성여왕이 초청했으나 사양하고 김해의 소율희라고도 하고 김율희라고도 하는 호족이 지은 봉림사에 주석하면서 봉림산문을 개산하신분이라 한다.


소율희 그 이름이 재미있다. 소율희는 김해, 창원을 거점으로 활약한 해상 세력인데 취급 품목이 쇠와 유리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소는 쇠의 우리말이고, 김은 쇠의 한자 발음인 것이다. 율희는 유리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일 것이라는 해석이다.

동부도는 원종국사찬유 스님의 부도다. 원종국사는 상주 삼랑사에서 9살에 출가 혜목산으로 와서 심희 스님의 법맥을 이었다. 당시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고 승려대회를 열 때 3대 선원 중의 하나인 고달원(고달사)에서 200명의 승려를 참석시킨 분이 바로 찬유스님이다.

동부도의 특징은 목을 길게 빼낸 용이 고개를 서쪽으로 돌려 스승이었을 서부도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각박한 세상에 사제간의 정이 이렇게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김 원장의 스승이신 김윤곤 박사(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부연 설명으로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 한 후에는 용조각도 전쟁시기에는 무섭고 힘찬 모습에서 평화의 시기에는 민중과 호흡하는 친근한 모습으로 변했다고 한다.

▲ 비신이 복원된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 박익희 기자


이곳을 3번이나 왔지만 모르고 보면 까막눈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새삼 깨닫는다.
어쩌면 김 원장은 우리의 문화재에 대하여 인물과 역사와 연대에 대해서 비상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매번 놀라지만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무궁무진한 실력을 갖추었다.

그래서 탐방객들은 항상 김재원 박사를 따라 나선다. 어떤 이는 국보급 문화재는 김재원 박사라고 말한다. 그러면 김 박사는 "다 살아가기 위해서 그렇게 되었다"며 겸손해 한다.
 
수백 년의 세월의 무게를 거뜬히 견딘 느티나무 아래서 늘 티 없이 살아가는 의미로 기념촬영을 하며 추억을 만들었다.


  느티나무 뒤편 도랑에는 빨래터가 있고 빨래터에 박힌 돌도 소중한 문화재의 잔재이고 도랑을 건너기 위해 놓은 돌다리도 석공의 아름다운 솜씨가 남아있다.
 
돌다리를 건너자 고달사지를 발굴하며 나온 사람크기보다도 더 긴 돌들이 무더기로 방치되어 있다. 하루빨리 고달사지 부지에 가지런히 옮겨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려오는 길에는 쑥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눈썰미가 남다른 여성탐방객은 아무래도 쑥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는지, 한웅큼 쑥을 뜯어 쥐고서는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시간이 부족하여 고구려 식실 분묘는 못보고 하산을 하여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 문화유적지의 대표 음식인 천서리 막국수집을 얘기하며 관광버스기사에게 가자고 했다. 워낙 유명한 식당들이라 휴일에는 예약 자체가 안 된다고 했다.
 
H막국수집을 찾아서 인원만 얘기하고 빈자리에 앉아서 비빔막국수와 물막국수중 택해서 먹으니 여기저기서 사리 추가를 외친다.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신발만 전문으로 정리해주는 노인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김윤곤 박사가 집 뜰에 직접 심어서 수확한 매실로 담근 매실주 2000ml를 은근슬쩍 하사했다. 혀끝을 가볍게 자극하면서 입속 가득히 매향을 풍겨내는 감칠맛이야말로 어떤 술에서도 느낄 수 없는 특미다.

그야말로 유행가 가사처럼 죽여주는 맛이라 할까. 영남대학의 미생물학과 교수가 그 비법을 묻자 김 교수는 ´매실이 익기 전에 따서 약간의 설탕에 쟁여서 소주와 고량주를 일정량 부어 밀봉한 후 지하실에서 1년 이상을 숙성시켜야 제맛이 난다´고 한다. 매실을 따는 시기와 재료의 섞는 비율과 숙성 장소의 선택과 시간이 맛을 결정 지우는 김박사의 가양주이다.
 
여행과 공부는 재미가 있어야 효과가 있고 호기심과 관심은 지적인 욕구를 충족해주는 계기가 된다. 또한 여행 중 만나는 사람들에게 배우는 재미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은 사람과 사람을 쉽게 이어주어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된다.[ 데일리안 경기 = 박익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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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4/21 [15:51]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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