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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 궁녀들은 왜 여지수에 몸을 던졌나
공민왕의 전설 이천.여주 원적산성
 
최진연 기자 기사입력  2012/03/22 [11:06]
 
▲  멀리서 본 원적산성   ©최진연 기자

이천에서 이포대교로 가는 방향 왼쪽에 원적산(634m)이 위치해 있다. 서쪽의 정개산부터 시작된 산줄기는 여주와 이천, 광주땅까지 파고들어가 크고 작은 봉우리를 타고 넘는다.

원적산은 웅장하지만 가파르지 않고 등성이가 구불구불해 할머니 등처럼 부드럽다. 주봉은 천덕봉이며 그 아래로 원적봉이 연결돼 있다. 정상에서 보면 신둔과 백사면, 여주 흥천까지 광활해 세상이 온통 발아래 있다. 

 

▲ 원적산성 전경   © 최진연기자
이런 거산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늘 떠돌아다닌다. 천덕봉의 유래도 심상치 않다. 고려의 등불이었던 31대 공민왕이 중국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다해 공민봉으로도 부르는 곳이다. 당시 원적산에 여지수라는 못이 있었는데 공민왕을 따라 피난 왔던 많은 궁녀들이 개경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다.

 가능성을 뒷받침 하듯 원적산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면 알듯 말듯 한 토성흔적이 있다. 조선후기 발간된『여지도서』『이천부읍지』에는 고려 공민왕 때 처음 쌓았는데 지금은 폐성됐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 정상부의 토축    © 최진연 기자
원적산성은 전체 둘레가 7km에 달하는 대규모의 포곡식 토축 산성이지만 성벽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풍우로 인해 대부분 자연 유실된 상태다.산성은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부터 시작해 영원사와 원적사 뒤를 돌아 원적봉을 이어 천덕봉을 지나 다시 주록리로 내려온다. 성벽 밖은 이천땅이며, 내부는 깊숙한 골짜기로 형성돼 있는데 여주 땅에 속한다. 

 토성 흔적이 가장 잘 남은구간은 원적사 뒤쪽 등성이부터 성안으로 통하는 옛길에 있다. 출입을 통제할 목적으로 쌓은 옹성형태의 관애도 보인다. 축조방법은 하남의 세미재관애와 비슷하다. 성벽상부에는 모아놓은 석재도 노출돼 있다. 

▲ 원적산성에서 본 성내부     ©최진연 기자

원적봉에서 정상으로 가는 방향 일부구간에도 인위적으로 쌓은 토축을 볼 수 있다. 성벽전체 조사는 잡목 때문에 접근이 불가능하며, 대부분의 구간은 등산로만 빤히 보일뿐 안과 밖은 가파른 지형이다. 산성은 높은 등성이를 자연성벽으로 이용했고 사람의 접근이 쉬운 곳만 흙을 돋아 올렸다. 

 산성의 축성 시기는 유사시를 대비해 급조한 고려시대 피난성으로 추정된다. 포천의 명성산성, 양평의 함왕산성 같이 고려 때 입보용 산성처럼 높은 고지대에 허술하게 쌓음 점이 유사하다. 원적산성 인근에는 동쪽의 파사성과 술천성, 남쪽은 신지리산성, 이천의 설봉산성, 설성산성, 효양산성 등이 있다. 
 
▲ 5부 능선상에 축조된 토축     © 최진연 기자

원적산의 생김새는 동서가 길다. 이천의 북쪽을 병풍처럼 막았다. 설봉산과 벽을 형성해 그 중간에 서울로 통하는 넋고개가 관통돼 있다. 

 고려 태조왕건 만큼 유명세를 떨쳤던 공민왕의 향기가 가득한 원적산성에 봄기운이 감돌고 있다. 겨우내 움추렸던 몸과 마음을 한 번에 날리고 싶다면 원적산성으로 가자 산 아래 영원사에서 1시간 30분이면 족하다. 〔최진연 기자〕


시대 - 고려시대
위치 -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경사리



<우리 터, 우리 혼>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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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3/22 [11:06]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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