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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 답사기, 온통 푸른 고장…볼 것도 많다
경남 산청 답사 여행기
 
박익희 기자 기사입력  2012/07/09 [11:15]
▲ 산청군 생초면 소재지에 있는 목아전수관     © 박익희 기자


가뭄이 기승을 부리는 지난 6월 30일 벼르고 벼른 경남 산청군으로 여행 겸 소풍을 떠나는 날이다. 수원에서 목적지인 산청군 생초면의 목아전수관은 약 3시간 30분이 소요됐다. 간밤에 기다리던 단비가 왔다. 나는 대구에서 아내를 태우고 88고속도로를 저속으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도로는 2차선에 누더기로 변해있었으며 공사로 군데군데 위험한 곳이 많았다. 

약속시간을 10여분 늦게 도착한 山淸은 이름 그대로 온통 산은 푸르고 맑고 깨끗했다. 국보급 인간문화재인 목아 박찬수 선생이 고향을 위해 만든 전수관과 국제조각공원은 경호강가에 태모산 자락에 있다. 옛부터 강을 끼고 인간은 살아왔다.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옛시절에는 경호강을 끼고 수렵과 농경생활을 유지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  생초약초식당에서 본 온통 푸른 산청군의   산천, 산위에 8각 정자가 조그만 하게 보인다 © 박익희 기자


목아 선생의 안내로 생초약초식당을 찾으니 10여명의 손님이 멀리서 오는 손님을 반긴다면서 푸짐한 상을 차렸다. 멀리 하동에서 장어와 숭어를 공수하여 왔으며, 여수에서 온 국악하는 부산대학교 교수님과 제자까지 모였다. 오후 2시경되어 시작한 점심시간은 노태섭 전 문화재청 청장 등 선후배와 외지 사람들의 소개와 인사와 노래로 끝났다.

약초의 고장 산청의 동양당한약방 김태훈선생이 목아선생과 우리들을 위해 마련한 자리이다. 이런 배려로 오늘 여수에서 온 교수님으로 부터 우리 가락인 창을 들을 수 있었다. 전 문화재청장 노태섭씨는 기분이 좋은지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식당의 창밖의 풍경은 녹음으로 온통 푸르고 푸르렀다. 경호강은 가뭄탓에 레프팅 하기에는 수량이 부족해 보였다. 오늘부터 경기지방에 장마전선이 머물러 수도권에는 해갈이 되었지만 남부지방에는 이제부터 비가 올려는지 하늘에는 잔뜩 먹구름이 끼였다. 

▲ 태모산에서 본 산청은 겹겹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고 중간에 경호강이 흐른다.     © 박익희 기자


가뭄에 지친 산천초목과 농작물에는 비가 와야지 해결된다. 단비를 맞은 농작물은 본래의 때깔을 내며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농부의 한숨이 기쁨의 환희로 바뀌려면 하늘의 도움이 있어야만 된다. 댐을 막고 보를 막고 가뭄을 해결하기 위해 관정을 박아 지하수를 끌여올려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햇빛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우리나라 3대산(백두 한라 지리)인 지리산을 품에 않은 산청은 지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1915m)을 끼고 있으며 지리산 자락의 계곡물은 경호강에 모여 섬진강에서 남강으로 흘러들어가 남해 바다로 흐른다.

▲ 신의로 알려진 유의태 상, 목아 박찬수님의 작품이다.     © 박익희 기자


목아의 지인인 박명서씨가 안내한 곳은 산약초축제가 열리는 한방테마공원에 자리잡은 산청한의학박물관이다. 호랑이와 곰을 형상화한 큰 조형물이 서있고, 박물관 마당에는 아직도 공사가 한창이다.
 
온천목욕탕과 상가건물과 일반한옥 건물, 한옥촌을 건립하고 있었으며 몇 해 전 가짜로 국세를 만들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민**가 만든 한옥이 거창하게 자리잡아 공사가 중단상태로 흉물로 남아있어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므로 거짓없이 순수하게 살아야 된다는 점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래전에 드라마로 방영된 ‘동의보감’의 모태가 바로 이곳 산청이다. 의신으로 추앙받는 유의태와 그의 제자 허준이 주인공으로 나와서 의사의 존재가치와 생명의 귀함을 일깨운 드라마로 기억된다. 동의보감 소설에는 산청의 옛이름 '산음땅'으로 나온다. 


▲ 의성 허준 조각상, 목아 박찬수 작품이다.  글자는 금칠로 '생명의 빛'을 새겼으나 몰지각 한 사람들이 벗겨갔다.    © 박익희 기자


목아는 가난하게 자랐지만 장인으로 국가지정 인간문화재 목조각장 108호로 지정되어 유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직 고향에는 그의 존재가치를 아는 사람만 아는 것 같다.
 
그가 만든 醫神 유의태의 조각작품과 醫聖 허준의 조각품을 보면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명언이 생각났다. 목아는 항상 작은 형식에 구애됨이 걸림없이 거침없이 사는 기인이며 호방한 성격으로 시대를 통찰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

▲ 가야의마지막 왕인 구형왕릉 입구 전경    © 박익희 기자


다음에 간 곳은 가야의 마지막 왕이 영면한 구형왕릉이다. 구형왕릉은 어름 짐작으로 약 500평의 돌무덤으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문인석과 무인석, 앞에는 왕릉을 지키는 재실과 홍살문이 있었지만 왕릉이 골짜기에 있어서 신비했다. 나는 사실 구형왕이 누군지를 몰랐다. 박명서씨는 물고기 물만난 듯 줄줄 역사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가야의 마지막 왕이라는데 그는 아마도 일본으로 간 듯 역사속에 파묻혔다. 다만 왕릉입구의 절벽 바위에는 ‘열려라 참깨’식의 바위문을 조각했는데, 그 바위문을 열면 역사의 수수께끼는 풀릴지 모르겠다. 아마도 일본의 조상이 가야의 구형왕의 후손이 아닐는지? 판도라의 상자뚜껑은 닫힌 채로 그대로 있어야 신비감을 있을 것 같았다.

▲ 왕산 아래에 있는 구형왕릉, 돌로 만든 특이 한 형태이다.장명등과 문인석 무인석도 있었으며 이상하게 왕릉곡장안에는 나무 한그루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 박익희 기자


오는 길에 본 높고 푸른 지리산 산자락의 넉넉한 품과 풍부한 수량의 너른 산청의 들판이 걸출한 인재를 배출하는 고장이 아닐까 싶다. 특히 왕산과 문필봉, 멀리 황매산이 구름 속에서 보인다. 황매산은 철쭉꽃으로 유명하며 모산재는 산은 작지만 아름답고 절경인 곳으로 자꾸 가보고 싶은 곳이다.

 후미에선 우리는 지리산 둘레 길을 앞서가는 박명서씨의 차를 놓칠세라 정신없이 따라갔다. 알고보니 지린산둘레길(5. 6코스) 2개를 종주하는 길이였으며 박씨의 집인 지막계곡에 있는 청류동산장에 들려 오디즙과 금강주(전나무 속껍질로 만든 83도 짜리 가양주)맛을 보며 신묘한 술맛에 빠졌다. 

청류동 산장은 생초IC에서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있는데 여기서 한 1주일을 지냈으면 좋겠다. 삽살개와 고양이들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 왕릉 앞의 바위절벽에 비밀문이 새겨져 있다.     ©박익희 기자


청류동 황학산장(055-973-2781)은 박명서씨의 부인 김인순씨가 오랫동안 노후를 위해 가꾼 약 1000평의 대지에 여러 채의 한옥으로 만든 휴식공간이 있었다. 산장 바로 옆에는 폭포와 계곡물이 철철 흘러 넘쳤다. 명덕바위 아래에는 소가 형성되어 있어 목욕을 하면 선녀가 승천 할듯~ 청정한 곳으로 멋진 곳이다.

목아는 전수관 교육생들이 오늘 수료를 하는 날이라 한의학박물관에서 헤어졌지만 박명서씨에게 우릴 맡기고 볼일을 보러 갔었다. 이제 다시 산청읍내의 식당에서 전통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예전에는 임도였을 길을 지자체에서 길을 조금 다듬고 의미를 부여해서 걷는 체험을 하게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다. 하지만 푸른 자연에 도로를 내기 위해 포크레인의 삽질로 대자연에 무서운 상처를 낸곳이 보여서 안타까웠다. 


▲   여수에서 온 국악인과 다도인  © 박익희 기자


인생을 산다는 것은 항상 자기와의 싸움이고 도전이다. 인간은 걷지 않으면 죽는다. 1박2일에도 소개된 지리산 둘레길은 3개도 5개 시군(산청,함양,하동,남원,구례)과 18개면이 만나는 거대한 산군으로 계절마다 푸른 정기를 발산하고 생명체들이 기대어 살 수 있는 대자연이 펼쳐져있다.

목아전수관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막 쏟아지기 시작하는 세찬 빗줄기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폭우로 변했다. 맑은 날에 산의 날씨가 변덕을 부리고 소나기가 오고 세찬 바람이 부는 경험을 해본 나는 어련히 그럴꺼라 생각한다. 

전수관에는 목아 선생 부부가 우릴 맞기 위해 10채의 새이불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어느새 밤 10시가 되어 내일을 위해 자야할 시간이 되었다. 세차게 내린던 비도 멈췄는지 사방은 고요속에 빠졌다. 아마도 오늘이 음력 5월11이니 동산에 달을 볼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내일 아침에 산청 국제조각공원은 직접 안내 하겠다는 약속으로 친교의 시간을 갖고 외출은 안했다. 

목아의 건강 비결은 일을 열심히 하고 낙천적으로 살고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 같았다. 방에서 목아 선생이 평소하는 요가와 호흡법, 체조를 시범 보였는데 나보다 훨씬 연배이지만 더 어려 보이는 비결이 아닐까 싶었다.
 
화려하게만 보였던 목아 부부가 들려준 인생의 고비들, 7번을 이혼 할려고 했다는 고백과 목아의 각서 등, 목아박물관을 세우기까지 숱한 난관을 극복하고 그는 국보급 인간문화재로 우뚝 서있다. 


▲ 생초 국제조각공원  © 박익희 기자


한국 장인의 신기한 솜씨로 나무 토막은 순식간에 파안대소하는 형상으로 조각하고, 버려지는 고목으로 부처님을 만들고 다듬는다. 또한 그는 여러 단체의 장을 만나 거침없이 일을 저지른다. 아마도 남다른 창의성과 열정, 희생정신과 폭넓은 인간관계가 호감으로 만들어 능력을 인정받는게 아닐까. 그가 추구하는 가치있는 삶의 행보에 격려와 박수를 보낸다. 

먼 훗날 국내의 조각 작품인 국보에 선정된다면 그가 만든 상당수의 작품이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낯선 곳인 산청에서 목아전수관 한옥에서 간밤에 잠을 푹잤다. 2층의 아내도 낯선 곳에서는 잠을 못자는 편이였는데 잘 잤다고 한다. 새벽 6시에 나와서 모태산의 국제조각공원과 고분군을 둘러보았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전망이 좋았다. 경호강이 휘돌아 흐르고 하늘은 양떼구름과 푸른 새벽의 산자락 기운이 산을 넘어 이곳까지 전해져 왔다. 

▲ 남사예담촌의 연리지 X자형 회화나무     © 박익희 기자


이른 아침인데도 동네 할머니는 어제 밤에 내린 비로 밭의 농작물을 돌보고 있었다. 이곳은 예전에 옹기가마터였던 것 같다. 옹기파편과 상품가치가 없는 옹기들이 밭두렁에 경계석처럼 나딩굴고 있었다. 태모산에서 바라다본 산청은 겹겹이 산으로 둘러쌓여진 분지로 지리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물과 황매산 자락에서 흐르는 물이 모여 흐르는 경호강으로 흐른다.
 
 대전에서 온 아가씨가 국제조각공원과 목아전수관을 기웃거리며 여행자의 호기심을 드러낸다. 건너편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조각공원을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아침식사는 경호강에서 잡은 다슬기탕으로 송가네식당(055-973-2781)에서 맛있게 먹었다. 또 한사람의 김은주(산청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이 식당에 오고 어제 헤어졌던 박명서 부부가 합류하여 식사를 했다. 김은주씨가 척동산성을 얘기 하여 지척에 있으므로 모인 사람 모두가 첫 답사를 갔다.

▲ 숲속에 나타난 척동산성, 김은주 연구위원의 안내로 첫답사에 모두가 나섰다.     © 박익희 기자

 

▲ 산등성에 있는 산성의 저수지, 가뭄이 심했는데도 물이 있어 신기했다.     © 박익희 기자

 

▲ 멸실 되어가는 산성의 성곽 모습     © 박익희 기자


진주간 고속도로 옆에 있는 멸실된 척동산성은 예상보다 규모가 크고 동문지로 보이는 곳과 산등성에 있는 신기한 저수지, 군데군데 경호강에서 가져온 듯한 강돌과 화강석은 역사 속에 진실도 모른 채 나딩굴고 있었다. 어떤 곳에는 아직도 석축이 그대로 남았다. 

지혜 있는 자치단체장이라면 이런 천혜의 지형에 있는 산성을 약간만 손본다면 접근성과 전망이 좋은 산성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베일을 벗고 명물로 자리잡을 것임을 확신한다. 아마도 전망대 하나만 세워도 많은 사람이 몰려 올 듯싶다.

▲ 축성된 상태로 남아있는 산성 모습     © 박익희 기자


다음에 찾아간 곳은 고려 말 충신 문익점이 붓대 롱에 몰래갖고 온 목화씨를 처음 재배한 시배지에 들려 신도비와 박물관을 살펴보았다. 목화씨를 갖고 온 것이 중요하지 장인 정천익이 심은 것은 내겐 중요하지 않았다. 

흔히 의식주(衣食住)라고 식보다 의를 먼저 말한다. 아마도 배고픔과 불편한 주거시설은 어느 정도 참고 견딜 수 있으나 추운 날씨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의가 식과 주보다 앞선 선결 과제가 아닐까라고 추측해본다. 아무튼 의복이 날개임은 틀림없다. 짐승의 가죽과 삼베옷에서 목화를 가져와 무명옷을 만들어 보온하고 색을 들여 입는 기술은 목화가 국내에 들어오고 가능해졌다. 

▲ 문익점 시배지의 문익점선생유허비     © 박익희 기자

 

▲ 남명 조식선생이 후학을 가르쳤던 덕천서원     © 박익희 기자


 경(敬)과 의(義)를 실천한 지리산 처사 남명(南冥) 조식(曺植)

다음에 찾아간 곳은 영남 사림의 거두로 알려진 남명 조식선생의 德川書院과 山天齋를 보면서 벼슬도 거부한 초야에 묻힌 처사가 학문을 닦으며 실천하지 않는 성리학에 대하여 그는 지리산 자락에 머물면서 한양의 지식인과 양반사회의 지존으로 추앙받았다면 그의 인품이 어느 정도일까 싶다. 그러나 남명의 제자들은 조선이 일본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의 위험에 빠지자 그의 제자 50여명은 구국의 신념으로 의병을 일으킨다. 

조식의 학문과 실천의 지표는 ‘경(敬)’과 ‘의(義)’였다. 경과 의는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로 “군자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바깥을 바르게 한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식은 좌우명과도 같았던 경과 의를 실생활에도 옮겨, 몸에 차고 다니던 칼에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글을 새겼다. 

그에게 있어 ‘경’과 ‘의’가 가진 의미는 마치 하늘의 해와 달과 같은 것으로,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였다.‘경’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서 실천하라는 그의 가르침은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겨야 하는 실천철학이었다. 그가 제자들에게 강조한 것은 철저한 자기 절제를 통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한 절의였다. 

 홍의장군 곽재우, 정인홍,오덕계,정한강,김우옹 등 많은 선비들이 평소 병서를 공부한 덕분에 무지렁이가 아닌 의식있는 양반가의 의병장으로 나서 큰 전과를 올린다. 敬義堂이란 건물에 들어설 때 나는 문득 정의에 대해 생각이 났다.
 
명분에 집착한 성리학에서 남쪽의 밝은 별로 자임한 처사양반은 무엇이 의인지를 몸소 가르쳤지 않았나 싶었다. 남명은 방울인 성성자 2개와 작은 칼을 어리춤에 차고 다녔다고 한다. 


▲ 남명 조식선생의 산천재 모습, 앞의 나무는 남명 선생이 심은 매화나무 이다     ©박익희 기자


남명 조식 선생은 지리산을 12번이나 오르며 영호남의 양반과 교류하며 호연지기를 키우고 추상같은 절개를 지키고 바른 소리를 하며 그의 존재가치를 세상에 알린 분으로 기억된다.
 
수많은 지역의 양반들이 그를 흠모하며 문하생으로 들어와 공부를 했으며 남명 조식선생님은 看山看水 看人看世하며 권력에 초연한 선비로 동년배인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며 생을 마감한다.

이런 위대한 인물의 후예들이 산청인을 입신양명하고 세상의 밝은 빛으로 나게 한 것이 아닐까?

인구 3만5000명의 산청에서 지난 정권 때에는 국회의원 6명을 배출하고 했다하는 그 정신의 맥은 이어지고 이웃에 위치한 도시 진주의 상권은 산청사람이 장악하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그만큼 치열한 열정과 헌신으로 살기 때문이 아닐까?

조식은 임진왜란의 3대첩 진주성싸움과 행주성싸움, 한산대첩이 그의 제자와 그의 국가관으로 분연히 일어섰기 때문일 것이다. 백의종군한 이순신장군도 이곳 산청을 거쳐 다시 수군에 복귀했다고 한다. 

▲ 고 성철스님 생가     © 박익희 기자


다음의 방문지는 성철 대종사의 생가인 겁외사를 한바퀴 휙 둘러나왔다. 10여년 전에 지리산 천왕봉을 등산할 때 본 초라한 생가는 이제 엄청난 불사를 일으켜 불교의 성지로 자리매김 됐다. 성철 스님은 출가전 결혼을 하여 여자애를 하나 두었지만 출가를 해버려 딸아이는 문경의 산속의 절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왔다고 한다. 딸은 청담스님이 불교로 귀의하게 하게 만들고, 청담의 딸인 묘엄스님은 성철스님이 불교로 귀의하게 하여 부녀지간에 유명한 선승과 학승으로 큰 족적을 남겼다.

다음은 남사예담촌으로 돌담과 황토길 사이로 선비촌이 서있었다. 난 연리지가 있다는 김은주 연구위원의 안내로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X자로 서있어 서로 그리워하는 모양이로 산청을 소개할때 단골로 소개된다고 했다. 과연 사진을 찍으니 멋진 풍경이었다.

▲ 단속사지, 2기의 탑, 당간지주 및 정당매비각이 남아 있었다.     © 박익희 기자

 

▲   정당매화나무(오른쪽) 정당매비각  © 박익희 기자


단속사지에 외롭게 서있는 당간지주와 마주선 3층 석탑은 민가 속에 버려진 채로 홀로 서있다. 단속사의 본래이름은 이게 아니었단다. 워낙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사람이 덜 오게 단속하란 듯으로 사찰명칭을 단속사로 바꾸고는 절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하여 실소를 금치 못했다. 

폐허로 변한 단속사지에는 650년 된 정당매화나무는 수명이 다했는지 원래 기둥은 죽고 뿌리에서 잔가지가 새생명을 움트고 있었다. 경호강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래프팅 동호인들이 거친 물살을 저으며 지나고, 은어를 잡는 강태공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 산청 답사에 참가한 사람들, 왼쪽부터 근당 양택동, 김충영 수원시환경국장, 윤정희, 여주에서 온 2분, 목아 박찬수, 박명서 부부, 하동에서 온   이영권 대표   © 박익희 기자


박명서씨는 해박한 지식을 하나라도 더 전하기 위해 산청의 구석구석을 보러가자고 했으나 먼길을 다시 떠나야 하는 길손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서 물레방아식당(055-972-8290)에서 경호강에서 잡은 민물고기로 만든 은어와 모래무지 조림으로 맛있게 점심을 먹고 난후 아쉬운 귀성길을 올라야만했다.

지리산 자락은 어제밤 내린 비로 푸르름을 더해갔다. 이곳 특산물인 산청곶감의 쫀득하고 시원 달콤한 맛을 보면서 산청양파 한 자루씩을 선물로 받아 차는 기분 좋게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며 산청에서 만든 추억을 회상하게 한다. 꽃에 향기가 나듯 사람에게 향기가 난다면 이번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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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7/09 [11:15]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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