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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석 기고]실크로드 문화유적 답사기(3)- 하서회랑과 둔황
막고굴(莫高窟)
 
데스크 기사입력  2015/09/04 [00:16]


4 넷째 날, 막고굴(莫高窟)
 
답사 넷째 날, 드디어 이번 여정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막고굴을 가는 날이다. 약간의 흥분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둔황 동남쪽 25km 지점에 위치한 막고굴은 사막 한가운데 1,600m에 걸친 암벽에 1,000여개의 석굴이 있다는 장대한 석굴군이다. 현재 확인된 석굴만도 735개, 그 중 492개의 석굴에는 불상과 탑, 불화들이 모셔져 있다.

 

▲ 막고굴 모형도 - 둔황박물관     © 경기데일리

 

366년 낙준(樂樽)이라는 스님이 바위산인 삼위산에서 노을에 금색으로 빛나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감실을 개착해서 수행장소로 삼은 이래, 1,000년이란 긴 세월동안 조영을 계속하여 천불이라 불리는 거대한 석굴군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크게 번성하다는 뜻의 둔황은 오늘날 조용하고 한가로운 사막도시일 뿐이지만 2천년전 한나라시대의 둔황은 동서 문화와 상업의 중계지로서 대단히 번성했던 도시였을 것이다. 한의 서역경영이 본격화되면서 군인들의 주둔지에서 나아가, 이 곳을 통하여 불교가 전파되고 여러 민족들간의 교역이 활발했을 것이고, 자연스레 막고굴 역시 불교의 성지로서 애정어린 관심과 보살핌을 받아 왔으리라.

 

▲ 막고굴 1     © 경기데일리

 

아마도 부처님의 진정한 고향으로서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둔황은 중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방대하고 완벽한 불교예술의 보고로 평가받고 있다. 
 
막고굴 답사는 8개 석굴로 제한되어 있었다. 우리에게는 16, 17호와 28호, 29호, 61, 62, 63호굴과 96호, 148호굴, 그리고 332호 및 419호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보다 많은 석굴들을 볼 수 없어 아쉽기도 했지만 가이드의 인도로 정해진 석굴에 들어섰다. 여러 시대에 걸쳐 조성된 석굴의 내부는 한마디로 찬란했다. 사방 천장을 빼곡이 메운 수많은 불상과 불화들.... 이 작은 공간에 지극의 예술적 철학적 역량을 쏟아부은 것 같았다.

 

사방 벽면에는 부처님 세계에 대한 많은 감동적인 그림들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특히 굶주린 호랑이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그 먹이로 던지는 석가모니의 전생도를 보면서는 어떤 엄숙함마저 자아내게 하였다. 옛날 둔황을 오고가던 수많은 승려와 상인들이 이 곳에 들러 수행하고 안전을 기원했으리라.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하여 석굴마다의 특색과 가치를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인솔자의 설명으로 어렴풋하게 나마 조성시대별 차이점은 보이는 것 같다.
 

▲ 막고굴     © 경기데일리


장경동(藏經洞)으로 알려진 16, 17호굴에 들어갔다. 20세기초 왕원록이라는 도사가 16호굴벽에 숨겨진 또 하나의 측실 17호굴에서 5만여 점에 이르는 경전과 서화, 문서 등 이른바 둔황문서를 발견했다.

 

이러한 문화적 보물들은 당국의 느슨한 관리를 틈타 영국을 비롯한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 외국탐험대에 헐값으로 넘겨졌다. 그 중에는 우리나라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의 사본일부도 탐험대에 넘어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니 애석할 따름이다.

 

비록 과거 중국의 문화대혁명이나 19세기말 이슬람폭동시의 불교유적 훼손이 그 보물들의 반출을 정당화하기도 하나, 문화적 견지에서 뛰어난 고고학적 유물이 고향을 떠나 뿔뿔히 흩어지게 된 것은 역사에 대한 약탈행위가 아닐 수 없다.
 
막고굴에는 전체적으로 불교가 성했던 당나라시대의 석굴들이 많다고 한다. 인솔자이신 김재원 원장님의 설명에 의하면, 지금까지 발견된 492개의 불교석굴 중 당나라시대의 석굴이 232개굴로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특히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7세기말에서 8세기초 측전무후(624~705) 이후의 석굴들이 풍요롭고 아름답다고 한다.

 

측전무후는 당고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자기 소생의 딸을 죽여 전왕후에 뒤집어씌우면서까지 새로이 왕후가 되었으며, 그 후 고종의 후위를 이은 그녀의 아들 중종과 예종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중국역사상 전무후무한 여걸이었다.


마지막으로 96호굴로 들어가니 이 측전무후를 닮은 거대한 미륵불이 나를 압도한다. 높이 34m의 이 입상 석불은 대부분 후대에 새로 보수되었고 발부분만 당시의 형태를 재현하고 있었다. 발부분만으로도 어지간한 성인 남자의 몸통보다도 컷다. 당시 측전무후의 위세를 가늠해 본다. 
  
 

▲ 막고굴     © 경기데일리


이어서 예술적 가치가 높다는 45호, 237호, 275호굴 등을 추가로 보고 싶었으나 결국 보지 못하고 막고굴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둔황공항으로 가는 길에 박물관에 들렀다. 일정에 쫒겨 주마간산격으로 서둘러 보고나서, 각각 한글과 영문으로 번역된 막고굴에 대한 책자를 2권 샀다.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귀국해서 가끔씩 들쳐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둔황공항은 조그만했다. 출발이 1시간여 지연되었지만 다행히 북경으로 귀환했다. 오랜만에 한식 뷔페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호텔로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 북경 수도공항에서 대구행 비행기로 귀국할 것이다. 숨가빴던 지난 4일간을 되새기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5 답사를 마무리하며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해주는 고대교통로를 처음으로 실크로드로 명명한 사람은 19세기말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1833~1905)이라 한다. 이 길을 통하여 비단과 도자기, 옥, 유리제품, 유향 등이 오고갔으며 동서양의 문화와 사상이 전해졌던 소통의 길, 마음의 길이었다.
 

▲ 눈 덮힌 가련산     © 박익희 기자


그 중에서도 둔황을 포함한 하서회랑은 수천년동안 한족, 흉노, 선비, 강족, 서하, 몽골 등 많은 민족이나 국가가 각축을 벌이면서 명멸해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지역도 거의 중국화되어가고 있지만 둔황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인기있는 학문분야이다. 중국의 3대 현학(顯學)으로 갑골학(甲骨學), 홍학(紅學; 홍루몽 연구)과 함께 둔황학(敦煌學)을 꼽을 정도다.
 
그러나 자료가 방대하고 연구의 영역이 너무 넓어 지난한 역정임에는 틀림없다. 더욱이 수천년을 거슬러 고고학적인 고증도 쉽지 않다. 다행히 현재 중국의 서북대개발 정책으로 도로와 철도 등 교통이 원활해져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언젠가 기회되면 다시 와봐야겠다. 그 때는 보다 여유로운 일정으로 주변을 찬찬히 답사해 보고 싶다.
 

▲파노라마 처럼 펼쳐진  황량한 산이  펼쳐져 있다.  © 경기데일리


비록 짧은 일정에 야간이동을 하는 강행군의 연속이었지만 볼 거리, 느낄 거리가 많은 알찬 여정이었다. 석굴암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찬란한 천년의 문명 현장을 확인했으며, 도도한 인류문화교류의 역사에 어떤 경외감도 느낄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답사지 하나하나의 감동적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인솔자 선생님을 비롯한 삼국유사 문화유적 답사회원들의 노고와 열정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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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9/04 [00:16]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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