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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禁斷)의 절 '문경 봉암사'와 맛집 '다온정'
한국 불교의 기본원칙을 지키고 가르치는 절…수행기도 도량 문경 봉암사
 
박익희 기자 기사입력  2018/05/30 [07:47]

"1년에 단 하루 ‘부처님오신날’만 개방하는 문경 희양산 봉암사"


1982년 종단에서 봉암사를 특별 수도원으로 제정 공고하여 봉암사와 희양산 일대를 성역화 하여 평상 시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는 사찰로 유명하다.
 

▲희양산 봉암사, 절 마당에 하얀연등이 가득하다     © 박익희 기자


그래서 더욱 가보고 싶은 곳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5월 22일 새벽 4시경에 출발하여 오전 6시에 도착한 희양산(999m) 입구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소란스러웠다. 전국에서 몰려온 불교 신자와 등산객들로 들머리 입구에서 차량을 통제했다. 약 20여 년 전에 백두대간 이화령에서 대야산과 희양산을 등산한 적이 있었지만 명산대찰의 품에 자리한 봉암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필자는 교통 안내원이 시키는대로  가은초교 희양분교 운동장에 주차하고 카메라만 둘러메고 봉암사로 무료로 태워주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는 금단을 해제하는 특별한 날을 놓칠세라 만원이었다. 입석으로 약 2km 정도 이동하니 아직도 미명이다.
 
카메라 렌즈를 조립하여 사진 찍을 준비를 갖추었다.  일행들은 순례자들처럼 물소리가 들리는 오색연등을 매달아 놓은 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한다. 펑퍼짐한 너럭바위에는 깨끗한 계곡물이 흐른다.  내려와서 다시 보니 야유암(夜遊岩)이라고 쓴 글씨가 옛 선현들도 놀았던 명소였다. 올라갈 때는 몰랐지만 내려올 때 보니 회차 지점에는 금줄로 처져있는 서낭당이 당산나무 아래 신성하게 있었다.
 

▲  희양산 봉암사 계곡   © 박익희 기자


단청이  일주문 현판에는 희양산봉암사(曦陽山鳳巖寺),  안쪽은 鳳凰門(봉황문)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직도 여명이다. 신성한 곳을 향해 가는 순례자의 마음이 이럴까? 오늘이 부처님오신날이라  탐방객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농무에 쌓인 몽환적인 분위기에 모두가 조용하게 무언인지 모르는 경건함과 엄숙함과 청정함을 느끼고 원시 대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탐험가 같은 기분이랄까. 진리를 깨달은 석가모니부처님에 대한 경배하는 순례자의 마음일까.
 
아무튼, 나는 문명이 발달하고 최고로 풍요하지만 답답하고 무언가 불만에 차서 평정을 잃고 헤매는 나그네로 나란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과 실제의 삶의 대한 현실적 갈등과 부조화, 마음의 평화를 잃고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현 정부와 한반도에 드리운 전쟁의 공포와 오만불손한 북한정권의 돌변태도와 알 수 없는 권력자의 오만과 편견에 심한 회의와 불신을 안고 대자연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참을 가니 절 입구 침류교(沈流橋)와 용추동천(龍湫洞天)가 나왔다. 오래전에 읽었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  기억도 가물가물한 마애불부터 먼저 보기로 하고 계속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찰 안으로 들어가고 필자는 호젓한 숲길을 여유롭게 걸었다. 청량한 기운이 느껴지고 새소리가 들린다. 
 
길에는 요즘 흔한 야자매트도 없고 자연 그대로 원시 숲이고 계곡물은 맑고 깨끗했다. 절 입구 다리에서 약 1km 정도 계곡을 오르니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 나왔다.
 

▲  마애불과 계곡물과 백운대 글자   © 박익희 기자


그때 희양산의 하얀 바위가 구름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큰 바위에 새겨진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마애불!  연꽃을 들고 무엇인가를 기도하는 모습으로 이마에는 청옥을 박아 놓은 듯했고 광배는 없었지만 엄숙한 기운으로 빛났다. 나도 저절로 손을 모으고 이런 신성함과 경건함을 느끼게 해주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았다.

 

우리나라에 자유와 평화! 깨끗한 환경을 지켜주소서! 반목과 갈등이 없도록 화합하고 서로가 원망이 없도록 도와주소서! 가정이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리고 내가 하는 작은 인터넷신문 경기데일리가 진실과 본질을 제대로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언론이 바로 서는 대한민국이 되게 하소서! 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새벽에 출발하여 오길 잘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오신날 특별히 개방하는 이곳이 왠지 모르게 신성한 기운이 넘쳐나고 숭고한 마음이 생겨났다.
 
너럭바위 위쪽을 가보니 백운대(白雲臺)라고 쓴 바위에 옛사람들이 흔적을 남겼다. 마음 같아서는 신발을 벗고 건너편으로 가고 싶었지만 물이 너무 깨끗하여 오염시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흐르는 물을 보며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생각했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겸손(謙遜)과 부쟁(不爭)으로 도도하게 흐르는 물 같은 덕을 쌓는 일이다. 물은 곧 생명이다. 이처럼 깨끗한 계곡이 있는 것에 감사를 하게 되었다. 만약 이곳도 개방이 되었다면 오염은 불 보듯 뻔하다.
 
이제 청정기도 도량으로 봉암사로 가야한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대자연의 오케스트라를 들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물소리 새소리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 향과 음이온이 가슴을 시원하게 했다. 아니 허파가 시원하고 오감이 열린다. 대자연의 무대인 아침햇살이 비추고 5월의 신록은 푸르고 빛났다. 
 

▲ 봉암사 경내에서     © 박익희 기자



왜 봉암사인가?
문경 봉암사 결사정신이란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수행자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 해방의 격동기에 승려 청담·성철·자운·우봉·보문 등이 1947년 봉암사에서 일으킨 불교 정화 운동이 결행한 곳이 봉암사이다.
 
봉암사 결사의 주요 이념은 근본 불교의 지향, 계율 수호, 수행가풍 확립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근본 불교의 지향 2) 계율 수호 3) 수행자상 및 수행가풍의 확립한 것을 말한다.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성철스님은 봉암결사를 두고 혁명이라고 회고했다. 무슨 일이든 스님들이 직접 밥도 해먹고, 나무도 직접하고, 밭 매는 것도 하고, 곡식도 찧고, 일 안하면 먹지도 말고 지금까지 해 오던 모든 것을 다 바꾸자고 했다. 이렇게 실천을 하지 않으면 같이 살 수 없다고 마지막에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봉암결사의 핵심인 것이다. 특히 결사에 참여한 대부분의 승려가 수좌였기 때문에 선종 중심의 수행이 중심이었으며 청정한 수행성이 당연하게 중시되었던 것이다.

 

결국 봉암결사는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과 식민지 불교의 극복이라는 대명제를 실천한 운동이었으며 결사의 정신은 195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불교 정화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된 셈이다. 만약 이때의 봉암사 결사가 진행되지 않았다면 종파적인 문제를 떠나서라도 근대 식민불교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을 것이며, 불교 정화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사가 끝난지 올해로 66년이 되었다. 또 다시 결사가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불교 정화의 운동은 시대적으로 문경에서 지속적으로 움트고 시작되었음을 기억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문경시청 홈페이지 봉암결사 중에서>  

 

▲ 봉암사의 음수대와 수조, 굴뚝, 꽃 이모저모    © 박익희 기자


모든 종교에는 근원적으로 신성한 원칙, 불가역의 영역과 추구하는 목표가 있다고 본다. 불교의 기본원리인 불법승의 삼보를 지키고 가꾸고 전파하는 기본원칙을 말한다.
 
貪瞋痴(탐진치)에서 벗어나 생노병사 등의 인생 8고를 극복하기 위해서 팔정도로 수행하면 누구나 깨달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자유와 평등의 사상과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생명존중과 환경과 노동의 가치로 청빈하게 살아가는 정신이 불교의 참된 교리가 아닐까? 
 
나도 모르게 부처님오신날, 봉암사 사찰 경내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신성함의 충만으로 두 손을 모으고 세계 3대 성현인 부처님에게 봉축을 드렸다.  다른 사찰의 사천왕문에 해당하는  남훈루(南薰樓)가 솟을삼문처럼 있었다.
 
이제 농무가 완전히 걷히고 가람의 실체가 드러났다. 사찰의 규모가 컸다. 오색연등이 아니고 하얀 연등이 절 마당에는 가득했다. 남훈루 앞에는 연등을 접수받고 있었다. 다른 사찰의 경우에는 사전에 연등을 달고 가정의 행복과 개인의 복을 기원하지만 이곳은 평소에 금단의 구역으로 석가탄신일에만 개방하기에 오늘 연등접수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지증대사 승탑과 탑비와 삼층탑     © 박익희 기자



봉암사는 오랜 역사를 가진만큼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국보 제315호인 지증(證)대사 적조탑비를 비롯해 창건주 지증대사의 승탑인 지증대사 적조탑, 봉암사의 중창주인 정진대사 원오탑과 탑비, 국내에서 상륜부가 가장 아름답게 남아 있는 삼층석탑, 목탑양식의 봉암사 극락전이 각각 보물로 지정돼 있다.
 
대웅보전에는 불자들이 부처님을 향해 절을 올리고 어떤 사람은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며 앉아있는 모습도 보였다. 꽃 장식을 한 아기부처님에게 물을 끼얻는 관불식(灌佛式)을 거행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때 맞추어 피어난 불두화와  모란, 수수꽃다리, 매발톱 등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도적의 소굴이 될 뻔한 희양산을 국내 최고의 수행도량 선원으로 불교정신을 오롯하게 이어오는 봉암사가 우뚝하게 이어가기를  기원한다.
 
나는 김도헌 지증대사의 승탑의 아름다운 조형미에 놀라 한참을 살펴보았다.  돌을 다듬고 깨어서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만든 1100년 전의 석공의 능력에 찬탄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지붕돌이 깨어져있어 안타까웠다.  승탑비는 깨어져있었지만 이수 부분은 여의주를 희롱하는 듯 두 마리의 용 조각이 빼어났다. 지증대사 탑비의 내용은 최치원이 짓고 분황사 석혜강 스님이 새겼다. 지증대사가 열반하자 신라 헌강왕은  스님을 칭송하여 지증(智證)이란 시호를 내리고 적조(寂照)라는 탑호를 내렸다.  이때 세수 59세, 법랍 43년이었다.
 
대문장가 최치원은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로 빠졌다.
(嗚呼 星廻上天 月落大海)"라는 글로 스님이 입적하자 세상이 암흑 같다고 슬퍼했다. 
 

▲지증대사  승탑과 탑비에 아름다운 석공예 작품    © 박익희 기자



아름다운 조각술에 발걸음 떼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았다. 예전에 화순 쌍봉사의 철감선사 승탑을 봤을 때처럼 아름다움에 큰 감명을 느꼈다. 어떻게 1100년 이상의 세월을 지켜내며 이런 소중한 문화재를 남겼을지 신라인의 예술혼에 머리가 숙여졌다. 승탑의 기단부의 공양상과 가릉빈가 문비 등 세밀하고 정교한 돌조각은 오늘날도 흉내를 낼 수 없을 것 같다.
 
지증대사의 탑비와 승탑 앞으로 대웅전이란 현판이 건물 뒤에 걸려있는데 이곳이 금색전이었다.  건물은 단출했고 그 앞에는 삼층석탑이 단정하게 서있다. 석탑은 상륜부가 그대로 남아있어 신라탑의 전형을 보는 것았다. 證(지증)이라는 뜻은 지혜로움이 증명되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한편  金色殿의 주련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있었다.
 
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 어디에도 부처님 같은 분이 없나니
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에도 비할 데 없네
世間所有我盡見 세상 천지 내가 다 보아도
日切無有如佛者 부처님 같이 귀하신 분 없도다
 
지증대사의 능력과 법력이 뛰어남과 소박한 겸손한 인품이 더욱 유명하게 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스님의 겸손한 언행과 솔선수범은 왕과 백성, 스님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지증대사는 17세에 부석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혜은스님에게 선종의 교리를 배우고 운수행각으로 명성을 얻고 苦行(고행)을 몸으로 실천하여 비단옷과 솜옷을 입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스님은 산길에서 나무꾼을 만나 “먼저 깨친 사람이 배운 것을 나누어 주는데 인색하면 안된다.”는 꾸중을 듣고 크게 吾道(오도)를 한 것 같고 겸양과 청빈으로 솔선을 한 승려였다. 그는 헌강왕에게 “이것이 이것이니 그 나머지는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정관자득의 경지에 오른 큰 스님으로 헌강왕이 절을 올렸다고 전해진다.
 
성철스님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격물치지의 경지로 사물을 통찰하는 능력과 관조의 경지에 오른 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이층탑 극락전    © 박익희 기자


나는 극락전의 특이한 건물에 시선이 빼앗겼다. 2층탑 형태인가?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처럼 겹처마 형태인가. 아마도 조선의 존덕정이 이런 건축물을 보고 모방했던 게 아닐까?
 
대웅보전 앞에서 바라보니 앞산도 공제선이 부드럽고 병풍처럼 둘러쌓인 희양산은 신성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연꽃의 중심에 꽃술에 해당된다. 사찰은 임진왜란과 6.25, 일제시대를 거치며 옛 모습은 사라지고 없지만 가람은 좋은 위치에 넉넉한 자연의 품에 감싸여져 있었다.
 
아침 공양은 오전 6시~8시까지, 점심공양이 12시~ 오후 2시까지 시간이라고 안내판을 보았다. 많은 자원봉사자들과 스님들이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는 <자연과 물 & 사람들>을 취재하며 여러 곳의 사찰을 가보았으나 이곳이 단연 흰 바위산이 뿜어내는 기운과 청정함은 희양산 봉암사가 으뜸이 아닐까 싶다. 
 
지증대사(824~882)가 九山禪門(구산선문)으로 개산한 봉암사에서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며 있는데 어느 보살님이 "저기 사는 물고기는 팔자도 좋네. 잡아먹힐 염려가 없으니..." 정말 그랬다.  나는 그 소리에  갑자기 배가 고팠다. 그 보살임은 聞慶(문경) 加恩(가은) 사람으로 어디가 맛있는 곳이라고 맛집을 알려주었다.

 

나는 소박한 염원을 안고 귀가를 서둘렀다. 지증대사 탑비 재현한 모형과 희양산 봉암사와 관련한 시와 글씨를 모은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서 평소에는 절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될 것 같았다.  봉암사는 스마트폰도 터지지 않는 수도선방으로 남아있는 곳이라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가은의 맛집 '다온정'
그런데 가을 버스터미날 앞 민들레한정식 집은 음식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혼자는 불가하다니 어쩔 수 없이 문경새재 IC방향으로 오는 데 다온정이라는 음식점을 발견하고 늦은 아침을 먹기위해 들어갔다. 그런데 뜻밖의 맛과 정성, 친절함에 놀랐다. 
 

▲ 가은 논공단지 입구에 위치한  다온정 약돌숯불양념석쇠구이 정식 상차림 1인분 1만2000원,    © 박익희 기자


이곳은 개업한지 6개월 된 곳으로 군에서 제대한 아들이 서빙을 하고 엄마와 이모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곳으로 문경약돌 양념구이가 일미였다. 처음에는 약돌 숯불양념 석쇠구이 1인분이 되냐고 물었는데 "혼자 오셨으니 1인분이 된다"고 하여 다행이었다.  젊은 친구가 엄마를 도와주며 친절하고 겸손했다. 휴일이면 누나도 도와주러 나왔다.
 
전라도의 맛집처럼  18가지의 상차림에 모처럼 경상도에서 요런 훌륭한 맛집을 발견하다니 행복했다. 6월 문경새재에 또 와야 하는데 다시 오고 싶은 맛집이었다.  다온정(대표 곽귀남, 054-572-6700)은 문경시 가은읍 왕능리 75-2 번지 소재한 곳으로 상차림과 맛에 놀라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다.

 

알고보니 옻으로 만든 5년 숙성 된장에 친정에서 직접 기른 채소와 인공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담백한 음식이었다.  각 지방마다 토속적인 향토음식과 맛있는 먹거리가 있어 이를 맛볼 수 있다면 이 또한 즐거운 여행이 아니겠는가?

 

▲문경에서 나오는 거정석 가루를 먹인 돼지로 만든 약돌양념구이와 안동간고등어구이,  옻된장이 담긴 장독  모습과 다온정 곽귀남 대표     © 박익희 기자

 

나는 오늘 새봄에 가죽나무 여린 순으로 만든 고추장장아찌를 맛을 보고 사왔다. 아내는 맛을 보고는 "1만원에 양도 많고 맛있다"고 평을 했다.
 
과연 산고수청(山高水淸)한 문경은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고, 가은(加恩)은  은혜를 더하는 고장인 것 같았다. 이곳은 가은농공단지 입구로 가은중.고등학교 근방이다.  주위에는 레일바이크를 타는 연인과 가족들이 웃으며 지나는 모습에서 인간의 행복함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매 순간을 오늘처럼 잘 보내면 결국 인생이 행복하다. 푸르른 5월에 부처님 말씀을 새기며 이번에 못본 정진대사승탑과 봉암사 암자는 다음 기회에 다시 한번 가볼 생각을 하며  봉암사 답사기 졸고를 마친다.

 

-법구경 중에서-

 

벗어남의 맛을 알고
내려놓음의 맛을 아는 이는
근심과 악행에서 벗어나
진리의 기쁨을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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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5/30 [07:47]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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