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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윤 교수의 요동과 간도 답사기 1] 요동 벌판을 달리다
 
김성윤 기자 기사입력  2019/06/12 [09:24]

 

▲ 김성윤 교수, 단국대 전 법정대학장     © 박익희 기자

동 벌판을 달리다(1)

 

대련에서 단동에 도착 한 후 1박하고 압록강을 따라 동북 방향으로 가다가 옛 고구려 박작산성(호산산성)에 올랐다. 한발만 넘으면 북한 땅인 이뿌꽈(일보과:一步跨)를 사이에 두고 북한의 의주군 소속 우적도도 조망했다. 이어 압록강 하류의 태평댐 안의 장하도 하구 단교 또는 청송단교 밑으로 배를 타고 지나 북한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이곳서 청수여자 교화소와 자전거를 탄 주민과 트럭까지 육안으로 관찰했다.

 

통화에서 1박한 후 서파를 통하여 백두산에 올라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천지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다시 통화에서 1박 후 환인에 있는 고구려 제1수도인의 졸본성(오녀산성)을 멀리서 바라보고 박물관을 견학했다. 이어 집안으로 이동하여 광개토대왕 비석과 장수왕릉 그리고 환도산성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간도 지역이다.

 

필자는 1차로 서간도 지역을 5회에 걸쳐 답사기를 연재할까 한다. 아울러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편집자 주]

 

▲ 서간도 및 북간도 지도    © 김성윤 기자

 

인천공항에서 아시아나 항공 OZ301편에 9시 21분 탑승을 완료한 후 9시 37분에 이륙한 비행기는 10시 39분에 대련 공항에 착륙하였다. 그리고 수하물을 11시 13분에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인천공항서 대련 공항까지는 1시간 20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시간적으로 보면 김포 공항에서 제주 공항으로 가는 기분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중국이 한국보다 1시간 늦게 간다. 한국시간으로 11시면 중국시간으로는 10시다. 중국에서 대련(다롄)은 살기 좋은 도시 1위이다. 공원이 많고 도시가 깨끗하기 때문이다. 대련에 가면 가장 가 보아야 할 곳이 성해광장이다.

 

▲  뒤에는 주거 및 상가 지역이고 앞에는 바다인 성해광장은 초현대적이며 깨끗하다   © 김성윤 기자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성해광장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광장이지만 아주 자연스럽고 바다 쪽으로 툭 트인 반원형의 공원이다. 공산국가라고 하지만 이곳에서 만큼은 여느 자본주의 국가와 다를 바 없다.

 

그 어느 도시보다도 돈의 가치가 빛나는 곳이다. 시민들의 행동은 돈 쓰는데 자연스럽고 부의 여유로움마저 만끽하고 있다. 바다를 보고 여유롭게 산책도하고 놀이기구도 탈 수 있는 곳이다. 햇빛과 바다에서 바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가 일품이다. 성해공원에서 바다를 보고 사진을 찍어도 아름다운데다 규모가 엄청 큰 공원이다.

 

▲  성해공원은 바다물이 깨끗한데다 갈매기가 많다. 그래서 사진을 찍으면 갈매기가 함께 찍혀 더 낭만 적이다.   © 김성윤 기자

 

한국 사람이 대련에 오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여순 감옥이다. 안중근 의사와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곳이다. 10년 전에 가보았고 이번에는 단체로 온 관계로 성해 광장만 잠시 들렸다가 송도회집에서 한식으로 오찬 후 단동으로 가야 된다. 대련에서 단동까지는 고속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지난번에는 고속도로가 놓이지 않아 8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단동으로 이동해야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속도로 덕분에 4시간정도 버스를 타면 단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는 도중에 들녘을 보면 우리나라 들녘이나 다를 바 없다. 모내기를 막 마친 논에 물이 찰랑거리고 군데군데 농가가 정겹게 모여 있다. 이곳도 고구려인들이 살았던 곳이요, 농사 짓는 법도 우리와 너무 닮았다. 아마 선조들이 보급한 농법이기에 그러리란 생각이 든다. 차창 밖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랴오둥 반도의 서남쪽에서 동북쪽을 가로 질러 달리는 차량을 끝없이 볼 수 있다.

 

중국이 그만큼  잘살게 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제도 많다. 필요 이상으로 집을 짓고 도로를 닦고 공장을 지어서 곳곳이 비어 있다. 한국말로 유령도시, 유령 아파트, 유령 도로, 유령 박물관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 많은 부실이 경제발전의 부메랑이 되어 시민들의 발목을 잡을 날이 머지않다는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앞에서도 조금 언급했지만 랴오둥 반도(중국어 간체자: 辽东半岛, 정체자: 遼東半島, 병음: Liáodōng) 또는 요동 반도(문화어, : 료동 반도)는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남부의 반도이다. 한국의 서쪽 바다 건너다. 황해의 북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보하이 만의 일부분인 랴오둥만(遼東灣)이 있고 동쪽으로 서한만(西韓灣)과 남쪽으로는 바다 너머에 산둥반도(山東半島)가 자리하고 있다.

 

이 요동반도에 최초로 등장한 나라는 고조선이다. 기원전 300년경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을 공격하여 요동지방을 정복하고 요동군을 설치하였다. 4세기에는 선비족의 전연, 후연 등의 국가가 이 지역을 장악하였고, 5세기에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점령하여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7세기경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는 이곳을 지나 고구려와의 전쟁을 벌였던 주요 전쟁터이다. 비사성과 백암성 그리고 안시성이 모두 이곳에 산재해 있다.

 

▲ 전성기 때 고구려는 요령지역과 간도 및 연해주까지 영토를 확장한 대 제국이었다.   © 김성윤 기자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이 지역은 당나라의 관할로 들어갔으나, 당의 세력이 약화된 8세기 중반부터는 요동지방은 발해와 당의 완충지대가 되었었다. 903년 거란족의 요나라가 다시 요동지방을 차지하였고,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키기도 하였다.

 

이처럼 우리 민족과는 애증이 교차한 지역이다. 12세기 초에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거란을 몰아내고 요동지방을 차지했으며 몽골 제국이 금나라를 공격하자 거란족이 요동지역을 장악하고 몽골에 항복했다. 이후 원, 북원, 명에 속했다.

 

14세기 후반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아직 대륙의 주도권을 쥐지 못하던 시기에 공민왕과 이성계가 주도한 제1차 요동정벌로 한민족계 국가에서는 마지막으로 고려가 점령했다가 철수했다. 이후 명나라가 원나라를 몽골 사막으로 밀어내고 북진하면서 명나라 영토가 되었다.

 

이처럼 고구려를 비롯한 중국의 변방 민족들이 드넓은 요동 벌과 황량한 산을 오르내리며 서로 뺏고 빼앗긴 역사의 현장이요, 전쟁터를 우리가 탄 버스는 쏜살 같이 가로 질러 동북쪽으로 달렸다.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요구에 반발해서 고려 우왕과 최영이 제2차 요동 정벌을 추진했던 그 역사의 한 축을 이룬 곳도 이곳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무산되기는 하였지만 이 또한 우리에게 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땅이다. 역사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그 때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고 그 대로 대륙으로 나아갔다면 이 땅의 주인은 한민족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신라의 나당 연합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킨 일이나 위화도 회군은 민족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가슴이 답답하다.

 

17세기 초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요동반도는 청나라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 청일 전쟁으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자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에 의거하여 일본이 이곳을 차지했으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서방 3개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삼국간섭(1895년 4월 23일)으로 인하여, 결국 요동은 청나라에 다시 반환되었다.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건설되면서 요동반도를 포함한 만주대륙은 중화민국의 치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1914년 일본은 다시 이 지역을 강점했고, 1932년에 건국한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은 요동에 중심을 잡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엔 다시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공내전을 마친 뒤에 이곳에 랴오닝 성을 설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련에서 이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대교산 복무 휴게소를 들려서 용변을 보았다.

 

▲  대교산 복무 휴게소는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휴게소와 같은데 이용하는 차량이 없어 유령 휴게소나 다름없었다.   © 김성윤 기자

 

과거 중국 여행하면 가장 큰 걱정거리가 화장실 문제였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이나 다름없이 잘 지어진 휴게소가 고속도로 중간 중간에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화장지는 거의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족 안내자에 따르면 이 휴게소는 중국의 재벌 소유란다. 아직은 한국처럼 활성화가 안 되어 있지만 언젠가 돈 벌이가 될 것 같아 지금은 손해지만 돈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보고 운영 중이라고 하였다.

 

이곳으로부터 1시간 후면 단동에 도착한다는데 가이드의 안내와 함께 문득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백석 시인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시가 머리를 맴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나는 눈과 가슴이 뜨거워진다.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우리나라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백석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는데, 나 역시 백석의 시를 좋아하고 있다.

 

이 시를 되 뇌이면 삶이란 가끔은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운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의 삶”이지만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분단이라는 커다란 벽 앞에서 이 벽을 어찌 넘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우회하고 돌아서 북쪽을 보게 된다. 그럴 때면 답답하고 힘겹고 막막해서 모든 걸 팽개치고 싶다. 시인도 그런 것 같다.

 

우리와 다른 이유에서 그렇겠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서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지만 항상 ‘슬픔이며 어리석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기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고 자신의 의지로는 해결이 안 될 것만 같을 때 운명이나 신과 같은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한민족의 분단은 운명일까? 그리고 극복하기 어려운 일인가? 아니다. 눈앞의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의 눈을 바꾸면 된다. 사람은 주어진 삶을 그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운명이나 신의 뜻에 따라 그저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된다.

 

이 생각 저 생각하는 사이 백석시인의 시창작의 무대인 남신의주가 건너편에 보이는 단동 톨게이트를 빠져 나왔다. 나는 10년 전에는 이곳을 아주 많이 찾았던 기억이 있다. 북한 문제와 통일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 내 나름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1년이면 두세 차례 찾은 때도 있었다. 그래도 이루어진 것은 없지만 보고 전하다 보면 바뀔 것이란 생각에 여전히 이곳을 찾는다.

 

▲  단동의 압록강 강가이다. 건너편은 북한이다. 건너편 북한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 반면에 압록 강가 중국 쪽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었다.   © 김성윤 기자

 

그 당시에는 군인들이 통제하기 때문에 특별히 돈을 주지 아니하면 압록강 단교에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곳을 관광지로 만들어 비단이 장사 왕서방 동네에서 돈 벌이를 하고 있었다. 실로 놀라고 기가 찰 일이다.

 

▲  단동 압록강을 중심으로 수변고원이 잘 정비 되어 있다. 그러나 건너편 신의주는 미개발 상태에 있다.     © 김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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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6/12 [09:24]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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