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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윤 교수의 요동과 간도 답사기 3]애환(哀歡)서린 박작성(호산산성)에 서다
 
김성윤 기자 기사입력  2019/06/26 [13:07]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 침공에 대비하여 박작성(泊灼城)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성을 축조 하였다. 성의 위치는 랴오닝 성 단둥 시내에서 압록강을 따라 서북쪽으로 30여km 떨어진 관전현 호산향 호산촌 호산산성에 있다.

 

이 성을 축조한 목적은 압록강 하구에서 상류로 올라오는 길목을 통제하고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성은 애하(靉河)와 압록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돌출된 독립구릉 위에 자리 잡고 있어 지금 보아도 천혜의 요새다. 석축 성벽은 호산 정상의 능선을 따라 500m 가량이 확인된 바 있다.

 

▲ 박작성(호산산성) 서길수 교수가 촬영한 사진, 1998년 7월에 서길수 교수님이 찍은 호산산성의 고구려 성벽과 우물을 독자나 이곳을 여행하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고구려 연구 24집에서 재인용하여 보았다. 위 사진에서 본 멋진 우물과 성벽은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김성윤 기자

 

 그러나 지금은 거의 훼손되어 옛 모습은 사라졌다. 산 아래에는 직경 4.4m에 달하는 대형의 석축 우물지가 발견되었다. 우물 안에서는 길이 3.7m에 달하는 고구려 배를 비롯하여 다량의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그러나 이 유물은 훼손되거나 유실되어 지금은 볼 수가 없다.

 

▲     © 김성윤 기자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통하여 관련 기록을 보면 호산산성은 고구려 압록강 하구 방어의 중심지로 보인다. 서기 648년 보장왕(寶臧王) 7년에 당나라 1만의 병사와 고구려의 3만의 병사가 박작성에서 전투가 있었다고 나와 있다. 박작성은 고구려가 단동 지역을 차지하게 되는 4세기 이후에 건립된 주요 방어성이다.
 
그러나 2천년의 세월을 품고 근근이 견디어 왔던 박작성의 흔적은 지워지고 호산산성으로 그 이름마저 바뀌어 버렸다. 호산산성은 해발 146.3m로, 동서 길이는 1㎞, 남북 너비는 500m가량이다.
   

▲  호산산성 모습   © 박익희 기자

 

▲  역사는 기억하지 않으면 잊혀 진다는 말이 있듯이 고구려의 박작성이 호산산성으로 바뀌었다.    © 김성윤 기자


이곳은 애하와 압록강이 합쳐지는 곳이자 해발 146.3m로 평지에서 솟아 있기에 사방이 잘 보이는 천혜의 망루다.
   

▲ 압록강에 유입되는 중국의 17개 샛강중 하나인 애하가 합류하여 더 큰 압록강이 된다. 사진으로 볼 때 오른쪽 강으로 둘러싸여 비옥한 평야가 어적도이다.    © 김성윤 기자


호산산성이 위치한 호산은 평지에서 돌출한 독립 구릉으로 멀리서 바라볼 때 산의 형태가 호랑이가 평지에 누워있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호산이라는 명칭이 유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 새로 축조한 호산성은 누가 보아도 고구려 산성이 아니다. 중국의 만리장성을 모방한 짝퉁 성임이 멀리서 보아도 확연하다.    © 김성윤 기자


성 아래 남서쪽에는 북한의 섬 어적도(於赤島)가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장성을 살펴본 후 성곽을 따라 내려가자 작은 도랑이 나오고 그 건너가 압록강의 퇴적 작용으로 생긴 어적도(於赤島)다. 불과 1.5~2m나 될까? 긴 다리를 가진 사람은 뛰어 넘을 수 있는 그 도랑 앞에 일보과(一步跨)라는 돌 표지석이 우리를 압도한다. 
   

▲ 중국인은 조.중 국경선을 따라 일보과(一步跨)라는 표지석을 세워놓고 한국인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었다.     © 김성윤 기자


일보과란 한걸음에 넘을 수 있다는 뜻의 이름처럼 북한과 굉장히 가깝게 있는 국경이니 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이다. 어적도의 평야는 무엇을 파종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잘 정비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언제 일을 하였는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웰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쓴 초원의 빛이란 시처럼 세월 속에 퇴색된 채 말없이 우리를 바라본다.
 
초원의 빛
-웰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한때는 그리도 찬란한 빛이었건만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강한 힘으로 살아 남으리
존재의 영원함을
티 없는 가슴으로 믿으리
 
삶의 고통을 사색으로 어루만지고
죽음마저 꿰뚫는
명철한 믿음이라는 세월의 선물로
 
성의 뒤쪽은 북한과 더 가깝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알리는 도랑이 성을 따라 돌고 돌아 흐른다. 도랑의 앞에는 조그만 상가주택이 있고 그곳에서는 이 근처에서 생산된 농산품을 팔고 있었다. 우리 돈 천원이면 복은 해바라기 씨 1홉 정도를 살 수 있다. 그 공터에 '지척(咫尺), 일보과(一步跨)'라는 묵직한 돌 비석이 서 있다. 건너편에는 북한 측 초소도 보이는데 인기척이 없다. 마냥 조용하고 한적하기만 하다.
   

▲  어적도 밭에 무엇을 파종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농경지로 잘 가꾸어진 맨 아래쪽 파란 집이 북한군 국경초소이다.   © 김성윤 기자


이 성은 동북공정의 일원으로 1990년대에 검은 돌로 중국의 만리장성을 모방한 형태의 모든 성곽을 새로 축조하였다. 1천여 계단이 약간 안 되는 계단을 딛고 가파른 성곽에 오르면 압록강의 시원한 바람과 탁 트인 시야가 심신을 시원스럽게 달래준다.

 

한 가지 못내 아쉽고 답답한 것은 이 성이 만리장성 동쪽의 끝자락이자 시작점이라고 중국 측의 생떼가 마음에 걸린다. 원래 성곽의 축조 지형은 단동 쪽을 향해 서쪽방향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 호산의 서쪽 지형으로 축성되었던 성곽의 모양은 현재는 동녘을 방어하기 위한 성처럼 변성되었다.
 

▲ 호산성 정상에서 본 어적도와 강 건너 평안북도 의주군이다. 선조는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 평양성을 거쳐서 6월 평안북도 의주까지 피신한다. 그 의주 땅이 희미하게 보인다.    © 김성윤 기자


그래도 속일 수 없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실로 국제정치에서 힘의 위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현장이다. 그래서 나라가 안전하려면 카멜레온이 되어야 한다. 안내판에 명대의 만리장성 최동단 호산장성(虎山長城)에 도착했다는 표지판과 함께 명나라 성화 5년에 축조했다고 씌어있다.
   

▲ 호산산성의 도착을 알리는 표지석이 너무도 웅장하게 산성 아래 서 있다    © 박익희 기자

 

▲  호산산성   © 김성윤 기자


성화는 명나라 9대 헌종의 재위 시 연호이다. 이를 연대로 환산하면 1469년의 일이다. 그 당시 명나라 국경이 여기까지란 말인가? 상식을 넘어선 주장이다. 백번을 양보하여 생각해 봐도 당시 무주공산이던 요동벌을 확보한 후 장성을 연장해서 건설했다니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더욱이 이 성과 연결된 또 다른 성이 없다. 그래서 역사 왜곡이요, 사슴을 소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1998년 7월에 서길수 교수님이 찍은 고구려 호산산성 모습    © 김성윤 기자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 현재의 관심사에 의해 재구성된 역사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고구려의 중요한 유적이 홀대받고 엉터리 명나라 장성이 위세를 과시하는 현재의 모습은 정말 씁쓸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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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6/26 [13:07]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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