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문화ㆍ생활정보 > 맛따라 길따라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김성윤 교수의 요동과 간도 답사기 7] 고구려 제1도 졸본성에 서다.
 
김성윤 기자 기사입력  2019/08/05 [13:14]

 한민족은 요동을 비롯한 간도 곳곳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특히 이 지역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문명과 역사의 기록을 보고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만주벌의 옛 고구려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수시로 오랜 우리민족의 유산과 마주할 수 있는 것이 그 증좌이다.

 

오히려 우리 선조들의 문명과 문화를 피해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이 지역에 산재한 설화나 생활습관 그리고 문화가 온통 고려인이나 조선족의 문명을 떠나서는 대화조차 어렵다.

 

나는 우리 조선족 선조의 문화와 유물을 대하거나 마주칠 때마다 참 대단하다란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곳은 멀리는 고조선 시대부터 가깝게는 불과 100년 전까지 우리민족의 영향권 내에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지역에 따라서는 우리 문화와 관습이 생생하게 숨 쉬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고구려라는 강대한 대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문명과 다양한 스토리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 스토리가 고구려의 수도 졸본성과 국내성을 비롯한 여러 유적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 필자가 20년전에 졸본성에 갔을 때에는 입구에 고구려제1도란 돌 표지석이 있었다.    ©김성윤 기자

 

나는 이미 20여년 전 부터 고구려의 제일 수도 졸본성과 국내성을 비롯한 여러 유적지를 답사를 다녀온 바 있다.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였던 졸본성은 랴오닝성(遼寧省) 본계시(本溪市)와 환인시(桓仁市) 동북쪽 8km 지점의 산상에 있다. 환인이란 지명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인 또는 환웅과 같거나 비슷한 이름이다.

 

아마도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이름에서 나온 듯하다. 현재 졸본성이 있는 곳은 만족 자치시인 환인시안에 있다. 환인은 교통의 요지이다.

 

그러나 가는 길은 거의 깊은 산골짜기 길이다. 마치 강원도 산골길처럼 첩첩산중의 분지에 환인시가 있다. 분지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농사지을 들판이 있고, 먹고 마시며 농업용수를 조달할 혼 강이 흐른다.

 

또 한 분지를 산이 둘러싸고 그 안 솟아오른 바위산에 졸본성이 있어서 적을 방어 하는데 용이한 곳이다. 현재는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비정되는 곳이 졸본성이다. 이 졸본성(卒本城)은 추모왕 주몽이 압록강 지류인 비류수(沸流水)로 비정되는 혼강(渾江)옆에 산성을 쌓고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한 곳이다.

 

▲  국사 책에서만 보아왔던 졸본성 왕궁터를 표시한 입간판 옆에선 필자   ©김성윤  기자

 

이로부터 서기 3년까지 40년간 이곳이 고구려의 첫 수도였다. 이 성에는 고구려의 석축이나 성곽이 아직도 고구려의 특성과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고구려를 건설한 주몽(朱蒙)은 북부여에서 남하하여 졸본지역에 정착하여 대국가 건설의 근거지를 확보한 곳이다.

 

▲ 고구려는 건국 시 제1도 졸본성에서 제2도 국내성 그리고 제3도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긴 바 있다.    © 김성윤 기자

 

고구려 초기의 수도에 대하여 광개토왕릉비문에는 홀본(忽本), 삼국사기나 고구려본기에는 ‘졸본’이라고 표기되어있다.

 

위서(魏書)의 고구려 전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름만 다를 뿐 모두 같은 지역이다. 주몽왕이 비류수(沸流水) 골짜기의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수도를 정한 곳으로, 혼강(渾江)을 끼고 있는 비옥한 충적 지대이다.

 

환인분지의 약 800m의 산지에 축조된 오녀산성은 남북 약 1,000m, 동서너비 약 300m로 비교적 규모가 큰 성인데, 동·서·남쪽은 모두 넓적한 돌로 성벽을 쌓았고, 북쪽은 수직에 가까운 벼랑에 의지하여 성벽을 쌓았다.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3∼6m이다. 성을 축조한 돌의 크기는 대체로 30×20×35㎝ 정도이다.

 

▲성벽을 쌓는 돌 하나하나를 잘 다듬어서 견고하게 쌓은 졸본성     © 김성윤 기자

 

 성곽 부근에는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적석총을 비롯한 수많은 고분군이 현존하고 있는데 혼강댐 건설로 많은 유적이 수몰되어 있다. 나는 이 오녀산성과 주변의 고분군을 통하여 고구려 건국 초기의 국가의 성격을 상상할 수 있었다.

 

졸본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외길이다. 열여덟 굽이를 돌아서 험준한 요새인 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이란 의미의 18반(十八盤)길을 통과 해야만 오를 수 있다. 서문에서 출발하여 정상까지 S자형으로 지그재그 계단을 돌고 돌아서 험준한 요새인 산성으로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현재는 다니기 쉽도록 18반 중심에 990화강암 계단 길을 곧게 만들어 놓았다.

 

걸어서 졸본성 정상으로 가는 길은 오직 서문뿐이다. 서문은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한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비좁은 요새의 샛길이다.

 

▲ 절벽과 절벽 사이의 비좁은 길을 통하여 졸본성 정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    © 김성윤 기자

 

 서문 성문에 오르면 둥글게 옹성을 쌓아 적군이 성문을 공격하기 어렵게 만든 성을 볼 수 있다. 해발 800m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쌓은 고구려 특유의 테뫼식 축성 양식을 볼 수 있다. 인공적으로 깨고 다듬은 돌로 견고하고 높이 쌓은 성벽이 눈앞에 있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묻어있는 굽도리 축조공법도 한눈에 볼 수 있다. 굽도리성벽 축조 공법이란 성을 보다 견고하게 쌓기 위하여 층이 올라갈수록 안으로 들여쌓는 방식이다. 성 내부의 지세는 평탄하다. 서측은 절벽이 길게 이어져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 동측은 성문을 직접 공격할 수 없도록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옹성(甕城)이 있다.

 

▲ 사문의 비좁은 통로를 통하여 졸본성 성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평지가 나오는데 이곳에 왕궁터가 있다.    © 김성윤 기자

 

 이러한 방식은 고구려 유적 중 졸본성(오녀산성)과 국내성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 성곽의 특이한 양식이다. 고구려 성벽은 돌 사이 틈새에 작은 쐐기돌을 박아 성벽이 쉽게 무너지는 것을 방지했다.

 

힘겹게 18반 길을 올라와 본 졸본성은 그냥 육안으로 언뜻 보아도 난공불락의 천연요새다. 성안에는 천지라는 연못이 있고, 이 못과 연결된 조그마한 샘도 있다. 못이나 샘에는 고려인들의 손재주와 지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돌 하나하나를 잘 다듬어 쌓아서 만든 샘이요, 못이다. 그곳에는 고려인의 정성이 남아있고 생의 지혜가 살아 숨 쉬고 있다.

 

▲ 성안의 졸본성 유적지에는 표시만 왕궁터 라고 표지석만 세워 놓았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 김성윤 기자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약 2,000점에 달하는 고구려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 유물을 중심으로 고구려 제1도의 박물관을 '오녀산박물관'으로 이름 붙여 전시하고 있다.

 

▲ 졸본성에서 발굴된 고구려 시대의 유물이 오녀산 박물관에 전시 되어 있다.     © 김성윤 기자

 

이곳을 찾는 사람은 대부분 한국인이다. 그들은 이곳에 와서 중국공안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알게 모르게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중국 사람들에 대하여 비하하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 심정은 이해하고 나도 그분들과 같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이곳을 우리 역사로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다. 그 보다는 우리의 힘을 기르고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야 고구려 대제국의 영광을 다시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의 전쟁 영웅 보응우옌잡(武元甲)은 자신의 불패 철학을 '3불(不) 전략'으로 요약하여 설명한바 있다. 그 3불 전략이란 첫째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는다. 둘째 적이 좋아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는다. 셋째 적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도 감정은 절제하고 보 장군의 지혜를 되새기면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보았다.

 

졸본성에 산재해 있는 왕궁터를 비롯하여 주거지, 천지, 점장대 등 의 유적들은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86년 졸본성 산성을 발굴한 결과 금기, 은기, 동기, 철기, 자기, 옥기, 토기 등 2,000여점이나 되는 고구려 유물이 발굴되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생활용품과 비슷한 유물이 졸본성에서 대량 발굴되어 오녀산 박물관에 전시 되고 있다.     © 김성윤 기자

 

산성아래 주변에도 수많은 고분군이 발견되었는데 상당수가 수몰되었다. 서문에서 좌측으로 전망대인 운해송도(雲海松濤)로 갈수 있다. 운해송도는 말 그대로 운해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물결친다는 조망대이다. 성에서 멀리 보이는 비류수는 현재 혼강(渾江)으로 부여에서 탈출하던 주몽이 강 앞에 이르러 건널 수 없어 낙담하자 고기들이 몰려와 다리를 만들어 주몽이 건너갔다는 전설을 머금고 오늘도 2천년 역사의 사연을 안고 흐르고 있다.

 

주몽과 함께 여기에 살았던 고려인들은 지상의 영역에 속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하늘의 영역에 속했던 사람들처럼 신비스러워 보였다.

 

그들은 장엄한 산상의 요새 속에서 지상의 근심걱정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이 아닐까? 그 곳에는 생존경쟁과 죄악도 없어 보였다. 그들은 자연과 우주에 순응하며 살았으리란 생각만 들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이름은 추모라고 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주몽(朱蒙)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부르는 별칭이다. 따라서 주몽은 활을 잘 쏘는 명사수요, 장수이었던 것 같다. 주몽처럼 우리민족의 기상과 진취적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한 고구려의 혼과 흔적이 살아 있는 곳을 지적하라면 단연 이곳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쩌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사람 모습에서 문화 유적에 이르기 까지 변형되고  왜곡되어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해 가는 현실은 몹시 애처롭고 가슴 아팠다.

 

마치 함영숙 시인의 영혼의 열정 이란 시처럼 맑게 다가왔다 흐릿하게 사라진다.

 

영혼의 열정

-함영숙 -  

 

보이지 아니하는 것

만지지 못하는 것

느끼지 못하는 것

들려지지 아니하는 것

이런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번뇌케 하고

 

천지 창조 땅의 생명

천상의 영감

전능자의 말씀

이런 것들이 사람의 영혼을 새롭게 한다

 

영혼을 새롭게 하는 영혼의 열정은 믿음으로부터 온다

 

이 영혼의 열정이란 시를 되새기며 차라리 이 현실을 외면할 수만 있다면 외면하고 싶은 심정을 가슴에 새기고 머리에 간직해본다.

 

내가 탄 낡은 버스는 비좁은 골짜기를 돌고 압록강 건너 북한을 언뜻언뜻 보여주며 쉼 없이 달린다. 그래도 생각은 내 마음을 번뇌케 하였다가 새로움을 불어넣는 사이 고구려 제2도 국내성이 있는 집안에 도착을 알린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기사입력: 2019/08/05 [13:14]  최종편집: ⓒ ggdaily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 용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