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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윤 교수의 요동과 간도 답사기 8] 국내성의 애환과 북·중 국경의 현장
 
김성윤 기자 기사입력  2019/08/11 [13:46]
▲ 김성윤 교수, 단국대 전 법정대학장    

국내성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集安市) 통구성(通溝城)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이다. 대제국의 두 번째 수도답게 아직도 성곽과 도성의 윤곽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특히 국내성이 자리하고 있는 집안은 압록강 중류를 사이에 두고 북한의 자강도 만포시와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통구성에 있는 중소도시이다. 면적은 3408km²로 넓은 편이나 인구는 약 23만명 정도밖에 안 된다.

 

세계 각국의 국경은 강 가운데다 국경을 긋고 있다. 그러나 북한과 중국은 강을 공유한 관계로 압록강의 중국 쪽까지 북한의 영토이고, 중국에서 북한 쪽까지 중국의 영토이다. 그 때문에 배만 타면 양국의 땅까지 접근할 수 있다.

 

이를 이용하여 한국에서 온 관광객을 태운 보트나 여객선은 최대한 북한 쪽으로 다가가 준다. 배에서 북한 주민과 말을 할 수도 있고, 물건을 던져 줄 수도 있다. 집안의 압록강에서 배를 타면 북한에서 제일 크다는 만포에 있는 구리 제련소도 가까이 가서 볼 수도 있고 강가의 북한 주민도 육안으로 생생하게 목격할 수도 있다.

 

▲사진 왼쪽은 북한의 만포시에 있는 구리 제련소의 굴뚝과 공장 그리고 오른쪽은 중국의 지안시의 압록강변     ©김성윤 기자

 

서기 37년 고구려 제2대 왕인 유리왕이 졸본성으로부터 이곳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한민족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어오고 있는 도시이다. 천도 이후부터 427년까지 근 390년이나 고구려의 수도로서 가장 찬란했던 번성기를 누렸던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1만여 기나 되는 고분과 광개토태왕비를 비롯한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릉을 비롯한 수많은 유적지가 남아있다.

 

광개토태왕비는 414년 광개토왕의 맏아들 장수왕이 세웠다. 비석은 응회암(凝灰岩) 재질로 높이가 약 6.39m, 면의 너비는 1.38~2.00m이다. 측면은 1.35~1.46m지만 고르지 않다. 대석은 3.35×2.7m이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화강암에 예서로 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 150여 자는 판독이 어렵다. 내용은 대체로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태왕의 업적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

 

1880년에 농사를 짓기 위하여 이곳을 개간하던 농부가 광개토태왕비를 발견하고 관청에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현의 지사가 금석문에 밝은 관리를 보내 조사케 하였다. 그가 탁본을 뜨기 위하여 비에 덮인 이끼와 덩굴을 소똥을 발라 태워서 세월의 풍파로 마모되어 가던 비가 더 많이 훼손되었다. 그런데도 당시 탁본을 떠서 금석 애호가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비로소 이 비가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자연마모로 훼손되고 탁본 과정에서 비면의 일부가 훼손되는 것을 막지 못한 데 있다. 더욱이 일본인이 글자 몇 개에 석회를 바르고 글자를 고쳐서 탁본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4세기에 일본이 남한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악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중국마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고구려가 자기네 소수민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 데 우리는 힘이 없다. 유구한 역사를 돌이켜 보면 힘이 있으면 살고 힘이 없으면 죽거나 소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하늘이 정한 이치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힘의 법칙이 지배한다. 특히 국제관계는 힘의 산물이요, 힘의 열매이다. 힘이 세면 큰일을 할 수 있고, 힘이 약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이 국제관계의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고구려사를 원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을 기르고, 때를 기다리고 준비해야 한다.

 

우리 민족이 고난과 시련을 겪은 것도 힘의 부족 때문이었다. 우리는 튼튼한 경제력을 구축해야 한다. 견고한 국방력을 마련해야 한다. 국민들의 굳건한 도덕성을 함양해야 한다. 뛰어난 과학 기술력을 확보해야 한다. 공고한 단결력을 준비해야 한다.

 

이러한 힘의 토대가 있어야 견고한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고, 빼앗긴 우리 역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미·중간의 관세 문제나 한·일간의 백색 국가 배제 관계 또는 한·중간의 사드 배치로 촉발된 관광객 규제도 따지고 보면 힘의 문제이다.

 

▲  광개토태왕비는 대석(臺石)과 비신(碑身)으로 되어 있는데, 대석은 약 20cm 두께의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다듬은 것이다. 길이 3.35m, 너비 2.7m의 장방형으로 제3면을 빼놓고는 모두 깨어져 나갔다. 비신은 사각기둥 모양인데 어느 정도 다듬은 부분도 있으나 거의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사진은 보호막이 없을 때의 광개토태왕비의 모습이다.   © 김성윤 기자

 

 세계에서 비석이 가장 많은 나라가 중국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 많은 비석 가운데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장 거대한 비석이 바로 광개토태왕비라는 것을 중국학자들도 발표하고 동의한 바 있다. 일본 학자들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광개토태왕비는 높이 6.39m, 가로 폭 2m, 세로 폭 1.46m 나 된다. 이러하기에 그 규모면에서 가히 세계 최대의 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돌은 채석장에서 캐어 다듬은 것이 아니고 자연 돌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집안 현지에서는 이런 돌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큰 돌을 대처 어디서 어떻게 옮겨다 비석을 만든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서는 돌의 질을 응회암이라고 발표했는데 현지에서는 백두산 천지에 있던 강용석(降龍石)이라는 설도 있다. 광개토태왕비는 우리 눈높이 보다 네 배나 높기 때문에 한참 올려다봐야 할 정도여서 그 웅장함에 압도된다.

 

그러나 현재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 자체가 커서 멀리서 보면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비각은 1928년 집안현 지사의 발기로 처음 세워졌을 때에는 2층으로 된 비각이었다. 이 비각은 1976년까지 세워져 있었다. 그러다 1982년 중국 당국에 의해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비 주위는 보호구역으로 설정되어 철책으로 된 담이 설치되어 있다.

 

▲ 왼쪽 사진은  2009년 8월에 집안에 갔을 때는 유리관이 없었고  사진에 나와 있듯이 주위에 민가가 가까이 있었다. 오른쪽 사진은  2019년 6월에 가보니 주위에 민가가 철거되었으며 비석이 유리보호각 안에 있어서 가까이에서 볼 수 없었고 유리 보호벽을 통해서만 볼 수밖에 없었다.   © 김성윤 기자

 

비석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뉜다. 고구려의 건국부터 광개토왕까지의 역사를 다룬 첫째 부분은 묘비 제1면 1행에서 6행까지이다. 광개토왕의 정복 전쟁을 기술한 둘째 부분은 제1면 7행부터 3면 8행까지이다. 능비의 건립 및 수묘인에 관한 마지막 부분은 제3면 8행부터 제4면 9행까지이다.

 

유구한 역사 문화재가 말해 주듯이 집안은 우리나라와 가까운 이웃일 뿐만 아니라 북한과 철도로도 이어지고 있는 국제도시이다. 여기서 기차를 타고 단동을 거쳐 요동벌로 나아갈 수도 있고 장춘으로 갈 수도 있다.

 

▲2010년 8월 26일 김정일 위원장이 만포~지안 압록강철교를 이용하여 '동북3성'으로 갔던 곳으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이다.     © 김성윤 기자

 

이곳은 분명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요, 그들의 흔적이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그 흔적에 다가갈 수도 있고 만져 보고 숨결을 느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우리 선조들이 살던 땅이고, 우리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8월 2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태운 특별열차는 이날 새벽 0시대에 북한 자강도 만포를 거쳐 북·중 접경 지역인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 바로 이곳을 통과한 바 있는 그 철도의 건널목에 우리가 탄 버스가 멈추었다. 경고음 때문이었다.

 

마침 우리가 탄 버스가 철로를 통과하려는 그 시간 중국의 기차가 그곳을 지나가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서둘러 버스에서 내려 기차를 기다린 끝에 사진을 촬영 할 수 있었다.

 

이 철도가 바로 만포-지안(集安) 노선이다. 북한은 신의주와 단둥(丹東)을 비롯하여 남양과 도문 그리고 만포와 집안, 두만강과 하산 간 4개의 국제철도 노선이 북한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를 통하여  외부 세계와 연결되고 있는데 운 좋게도 그 중 만포 집안을 연결한 열차가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만포-지안(集安)간 철도가 연결되어 있는데 그 연장선상의 철도 위를 중국 열차가 지나가고 있다    © 김성윤 기자

 

국내성을 폐허라 부르기엔 너무도 많은 유적과 유물을 간직한 옛 고구려 대국의 수도이다. 역사적 상상력과 공감대가 부족한 사람에겐 중국의 동북공정과 고구려 문화유적에 대한 관심이 없는 중국인들에 의하여 많이 훼손되어 실망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대제국의 제2수도요, 문화유산의 보고로 생각한 사람들에게는 집안의 국내성을 눈으로 보고 발로 걸어서 돌아다녀 보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다. 한때 국내성이 지금의 어느 곳에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중국의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에 있는 통구성(通溝城)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 되고 있다. 이 성은 압록강 우안(右岸) 통구 분지의 서쪽 끝에 있다. 아쉽게도 성의 원형은 거의 손상되거나 훼손되었다. 성벽은 성안에 들어선 아파트의 무게에 눌려있는 느낌에다 화단처럼 보였다.

 

▲성곽 위를 따라5-6층의 아파트가 끝없이 들어서 있어서 허탈감마저 든 국내성 성벽     © 김성윤 기자

 

그러나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서 본다면 왕성했던 대제국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은 내·외벽을 잘 다듬은 네모뿔의 돌로 쌓은 석축성(石築城)으로 평면은 사각형이고, 방향은 115도이다. 동쪽 성벽의 길이는 554.7m,이고 남쪽 성벽의 길이는 751.5m이다.

 

이마저도 많이 훼손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성벽 위에다 아파트를 지었다. 이 밖에 서쪽 성벽의 길이는 715.2m 가 남아 있으며 성의 전체 둘레는 2,686m에 달한다. 이 성의 성문은 모두 여섯 곳이 있었다. 위치는 남북에 각기 하나씩 있었고 동서에 각기 둘씩 있었다. 성문에는 모두 옹문이 있었다. 성의 네 모서리에는 각루(角樓)터가 있으며, 4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치(치雉란 날아오는 화살을 막기 위한 구조물)가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 이 성은 그 규모로 미루어 볼 때 왕궁과 관청이 있는 거성(居城) 또는 도성임이 틀림없다. 국내성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도 평양·한성(漢城)과 더불어 고구려 삼경(三京)중의 하나였다.

 

고구려가 645년(보장왕 4) 당나라 군대에게 포위당한 요동성(遼東城)을 구원하는 데 신성(新城)과 이곳의 군사 4만 명이 동원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볼 때 이곳은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고구려의 정치·군사적 중심지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곳에 남아있는 고구려 최고 귀족의 분묘로 여겨지는 벽화고분도 많이 있다. 이런 고분은 평양과 이 일대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 점도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증좌이다.

 

▲ 5회분3회 묘에서 촬영한 수렵도는 고구려의 기상과 힘을 체감할 수 있다. 이 사진은 2009년 8월에 촬영한 귀중한 자료이다. 지금은 입장할 수도 촬영을 할 수도 없다고 한다.    © 김성윤 기자

 

그러나 666년(보장왕 25) 실권자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자 그의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생겼다. 즉 연개소문의 큰아들 남생(男生)이 국내성을 근거로 동생인 남건(男建)·남산(男産)과 대항하다가 당나라에 투항함으로써 이곳이 고구려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현재는 국내성 주변에 웅장한 광개토태왕릉비가 비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유리보호막 속에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하여도 가까이서 만져보고 사진 촬영도 가능하였으나 지금은 이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다. 광개토태왕비 서남쪽으로 200여m 떨어진 곳에 태왕릉(太王陵)이 있다.

 

그 왕릉을 멀리서 보면 돌무더기 같아 보이지만 다가가 보면 한 변의 길이가 66m나 된다. 높이도 14.8m나 되고 넓이는 무려 1,300평이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무덤은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무덤을 보호해 주었던 강돌과 돌들이 민낯을 드러내고 있어서 세월의 무상함과 패망한 왕국의 한을 느낄 수 있었다.

 

▲ 강돌과 산돌로 쌓은 광개토대왕릉인데 군데군데 패이고 허물어져 있다.    © 김성윤 기자

 

장군총에서 광개토태왕릉비까지는 일직선으로 1,650m, 광개토태왕릉까지는 2,050m인데, 이 세 구조물은 자로 잰 듯이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고구려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그리고 연개소문이다. 이중 연개소문은 왕은 아니었다. 따라서 두 분 왕이 가장 탁월한 고구려의 지도자요, 우리민족의 기백과 기상이 녹아 있는 왕이다.

 

그래서 인지 1960년대 우리나라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는 연개소문에 대해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이 돌아가시자 나라가 망했다” 라는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또한 광개토대왕의 비와 장군총에 대해서는 역사책이라고 이름붙인 책에는 모조리 등장할 정도로 우리에게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중 광개토대왕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장군총에 대해서 개략적이나마 살펴보겠다. 고구려의 제2도였던 집안에는 최소 1,300년 이상 된 무덤이 1만2천기나 남아있다. 그중에서도 신비로움과 웅장함을 중심으로 본다면 단연 장군총이 백미다.

 

▲장군총은 보통 무덤과 모양 자체가 다르다. 화강암을 계단식으로 쌓아 올려 완성한 조적식(組積式) 형태다. 높이는 12.4m이고 네 밑변의 길이는 35.6m인 정방형의 사각뿔인데, 네 측면의 사선을 이으면 경사는 대체로 45도가 나온다. 정면에서 보면 1:1:1의 배율로 삼각형을 이루는 무한 상승구조다.  맨 아래 계단을 상대석으로 보면 장군총은 3개 계단을 가진 7층 구조다. 고대에 3과 7은 성수로 여겨졌으니 21계단을 가진 장군총은 특별한 이의 무덤이 된다. 윗부분 구멍이 뚫린 곳이 묘실이 있는 곳이고 아래 1층에 기대놓은 큰 돌이 ‘정호석’이다. (2009년 신동아 5월호 윤영철 재인용)     © 김성윤 기자

 

용산을 배경으로 적갈색 돌로 쌓아 올린 장군총은 멀리서 보아도 확연히 보일 뿐만 아니라 적석총으로 쌓은 돌이 신비스러움을 더해 준다. 더욱이 가까이 접근하여 보면 그 위압감에 압도 되어 아~ 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도 조용하기에 대왕의 꿈과 의지와 기상이 세월 속에 함몰되어 모든 것이 덧없음을 실감 나게 해준다. 이전에 왔을 때는 클로바에 잡풀이 장군총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는데 지금은 바로 앞에 해당화를 심어놓고 그 아래 멀리는 붉은 함박꽃이 만개하여 있다.

 

비록 동북공정 차원에서 그렇게 관리한다고 하더라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군총은 기단 한 면의 길이가 35.6m나된다. 용산을 배경으로 비탈진 능선위에 높이가 12.4m나 되는 적석총이 우뚝 서 있기에 가까이에서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웅장했다. 1500년 이상 거대한 적석총이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신비로 왔다. 모두 7층으로 된 계단을 돌과 돌이 맞물리도록 쌓아 올렸다. 1층의 돌 하나의 길이가 5.5m나된다. 이처럼 큰 돌 1,200개를 쌓았다.

 

지금처럼 크레인 같은 중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사람의 손으로 자르고 갈라서 쌓은 장군총은 세월이 1,500년이나 지났는데도 원형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고대 건축물에서 삼각형이나 정사각의 뿔은 보통 ‘우주산(宇宙山)’을 상징한다. 정사각뿔의 중심점을 통해 하늘과 땅과 지옥이 연결된다. 인간과 천계(天界)의 결합이다.

 

이로 미루어 광개토왕·장수왕 묘가 아니라 고구려 시조를 모신 신전(神殿)이라는 (신동아 2009년 5월호 윤영철) 주장도 있다. 실로 고구려인들의 돌을 쌓고 다루는 솜씨와 정교한 기술과 우주의 섭리를 연결한 구조물이 눈앞에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는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7층까지 자유롭게 올라가 볼 수 있었는데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보호하여야 된다며 올라가는 것을 제한하고 있었다. 아쉽기는 해도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광개토태왕의 맏아들 장수왕이 누워있는 무덤 위를 밟고 오르는 것도 예의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국적을 떠나 온 인류의 공유재산이자 자원이고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솔선하여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이곳을 중점 문화재 관리지역으로 정하고 난 후 확연히 달라진 것이 있다면 광개토태왕릉비를 중심으로 서남쪽으로 넓은 지역에 부귀영화를 뜻한다는 목단꽃을 어림잡아 일만여 평이나 심어 놓았다.

 

6월 3일인데 붉은 목단이 활짝 개화하여 보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국내성의 옛 영화가 재현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다소나마 위안이 되었다.

 

▲ 크로바를 비롯한 잡풀을 제거하고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목단꽃이 심어져 있었다    © 김성윤 기자

 

우리는 이곳을 나와 환도산성으로 갔다. 옛 성은 사라지고 아예 새로 성을 축조하여 보여주면서 고구려 환도산성이란다.

 

역사적 고증도 없이 돈벌이를 위하여 환도산성을 중국의 소수 민족의 하나인 고구려성이라고 이름만 붙여 서둘러 다시 쌓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환도산성의 하단부만 원형이고 나머지는 그냥 산성이라기보다 주위의 돌을 모아 놓은 느낌이다.    © 김성윤 기자

 

▲ 환도산성 모형도     © 김성윤 기자

 

▲ 환도산성  입구   © 김성윤 기자

 

▲ 환도산성 모습     © 김성윤 기자

 

우리는 남문을 통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날이 흐려서 성벽도 거닐어보고 성안의 음마지도 볼 수 있었다. 음마지는 말에게 물을 먹인 장소다.

 

그 음마지 안에는 진흙탕 속에서도 맑고 곱게 핀다는 연꽃이 일부는 활짝 피었고 일부는 터트리기 직전의 봉우리가 맺혀 있었다.

 

▲ 밭 아래 네모난 조그만 저수지가 음마지이다. 연꽃이 물위에 심어져 있었다.    © 김성윤 기자

 

음마지를 지나 5분쯤 더 산 위쪽으로 올라가면 전투를 지휘했던 전망대가 우뚝 솟아 있다. 그 옆 소나무 숲이 고구려 병사들의 수졸 거주지이다.

 

근무와 훈련을 끝내고 말을 매어둔 채 쉬었던 곳이다. 그곳에는 그 옛날 고구려인들이 사용하였던 주춧돌로 보이는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 환도산성 수졸 거주지(丸都山城戍卒居住址)는 전망대의 수졸을 수용하는 주둔지였다. 전망대에서 북쪽 방향으로 15m 거리에 있다.     © 김성윤 기자

 

그러나 1500년 전 동북아의 패권을 다투던 그 성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많이 성벽도 달라졌고 성안의 집들도 모두 사라져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기억할 수 없는 것 같은 아쉬움을 간직하면서 성을 내려왔다.

 

성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하차했던 곳으로 나오기 전 왼쪽을 향해 10여보쯤 돌둑을 올라서면 수많은 돌무덤이 끝없이 펼쳐져있다.

 

귀하신 분들의 무덤이겠지만 지금은 그 이름도 모른 상태에서 보호되고 있을 뿐이다. 실로 세월의 무상함이란 말밖에 더 할 말이 없었다. 마치 서문인 시인의 가는 세월이란 시처럼.

 

가는 세월

-서문인-

 

나를 유혹하는

그대의 빛깔에

깊은 정 젖어 드는데

 

무정한 세월아

아서라

꽃잎 떨구지 말아라

 

너는 어이해

내 빈 가슴속에

둥지도 틀지 않고

새처럼 훌쩍 날아가 버리는가

 

발 동동 구르며

서러운 이별로

가는 세월아

 

이리와

술, 한잔 받고

쉬었다 가거라

 

▲  환도산성 아래 북동쪽으로 고구려시대의 수많은 돌무덤이 끝없이 산재하여 있다.   © 김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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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8/11 [13:46]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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