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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문 체험수기]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된 나의 인생 여정(1)
일본은 노무자의 우편저금을 반환하라!
 
데스크 기사입력  2019/08/29 [15:04]

나는 전 소련-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공로, 원로 명예교수 전학문 박사이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된 나의 여정을 3회에 걸쳐 '경기데일리'에 연재 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사할린에 남아 있는 한인 동포의 애환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만행 그리고 현재도 반성할 줄 모르는 아베일본 총리의 강제 징용된 노동자에 대한 그의 사고와 정책적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전학문 가족     © 경기데일리

나는 일제의 쇼와 11년인 1936년 9월에 남부 사할린의 조그마한 시범 탄산 텐나이(天內) 마을 석탄 채굴광부 가정에서 태어났다. 6남매 중 막내로 형님과 누이들에게 응석을 부리며 너무 철없이 굴었던 어리석은 동생이었다.

 

1936년 9월 1일에 태어났는데 1936년 4월 1일  태어난 것으로 1941년에  호적등본을 바꾸어 채 5세가 안 된 나이에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이름마저 나카무라 후미요시라고 바꾸었다. 이 이름을 가지고 한국에서 집단적으로 강제 동원된 노역부의 아들이 되어 사할린 토로 탄산시로 이주하였다. 나는 그곳에서 일본국민 심상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다.

 

그때부터 나의 부모님이나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 군국주의 교육을 받아야 되었다. 이 당시 받았던 교육은 일본제국주의 사상과 정신을 완벽하게 익히는 것이 전부였다.

 

일본 역사 교과서 및 동화, 영화는 물론이고  형이나 누님들로 부터 들은 일본의 유명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교양이요, 건전한 시민이 되기 위한 기초 교육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은 하와이 진주만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의 거대한 함대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소위 태평양 전쟁을 알리는 신호요, 제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었다.

 

개전초기에 기습공격이 성공했다는 보도를 듣고 학교강당에 모인 학생들 모두는  일본말로“반자이 우리 말로는 만세”라고 외쳤다. 전쟁이 시작된 약 3주일 만에 괌 상륙에 성공하였다. 연이어 말레이 앞바다 해전에서 승리와 웨이크 섬 상륙 그리고 홍콩 점령이라는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이 같은 승전 소식이 알려질 때마다 철없는 나는 일본제국주의가 나의 조국으로 착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너무도 고무된 기분과 우월감은 나 자신을 하늘이 선택한 선민으로 착각까지 일게 만들었다. 당시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 가졌을 뿐만 아니라 천황에 대한 공경심 까지 느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일본군의 패배의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일본천황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나는 일본 국민으로서 좌절감과 공포감을 넘어 비통함까지 느껴야 했다. 당시 이 같은 비보를 들은 우리는 강당에 주저앉아서 다함께 통곡을 하였다.  

 

1945년 일본의 패배 후 남부 사할린은 소련군대에 점령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소련공산주의로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정치 체제가 교체되었다. 이번에는 일본 제국주의 교육이 아닌 공산주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나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제국주의 교육에서 공산주의 교육을 어린 나이에 받아야만 되었다.

 

일본의 패전 2년 후인 1947년 사할린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하지만 조국이 분단된 우리 한인들은 사할린에 억류되어 무국적자(無國籍者)로 살아야 되었다.

 

일본에서 소련으로 그리고 다시 러시아로의 정권 교체가 되었다. 바꾸어 말한다면 제국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다시 민주주의 제도로 정치 체제가 바뀌었다. 이때 마다 살아남기 위하여 새로운 교육과 생소한 사회 체제에 적응하여야 되었다.

 

이 같은 새로운 체제에 적응 하면서 살아야 했던 사할린 한인 1세들은 그토록 그리워했던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둘 숨을 거두어 사할린, 동토(凍土)의 땅에 묻히고 말았다. 지금은 교민 1세는 생존자가 없다. 이제 고령이 된 그들의 2세가 있을 뿐이다. 그들마저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상태에 있거나 일부만이 한국으로 영주 귀국하여 그토록 그리던 고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만일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정책이 없었더라면 사할린 한인들은 그토록 고통스러운 숙명과의 싸움도 없었을 것이고 여느 풍요로운 한국의 중산층처럼 살고 있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나는 2014년에 펴낸 저서 “일본 침략정신과 사할린 한인의 숙명”(나라원 출판사)을 통하여 아주 적나라하게 기술하고 소개한바 있다.

 

1947년 5학년 수업을 이수하던 중 일본의 패망으로 일본학교가 폐교되고 그 과정은 조선학교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공산주의 치하의  조선학교로 편입되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 후 사할린 사범학교 조선학과에 입학하여 조선어와 러시아어로 공부를 하였다. 나는 이곳에서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 하였다. 나는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구 소련 과학아카데미 소속 과학연구소에서 토양 및 환경미생물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준박사,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국제 토양학 및 미생물학술회에 수도 없이 참석하였다. 그런 기회를 통하여 일본학자들과 만나 교류를 하기 시작하였다.

 

일본학자들의 초대를 받아 일본을 방문하게 된 시기는 1988년 가을이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그 당시 서울 하계올림픽대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43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다. 처음 방문한 곳이 센다이시 동북대학이었다. 그 후 나고야, 교토, 규슈, 홋카이도대학에서 환경을 보전할 수 있는 미생물 농법에 대한 순회강연을 실시하였다.

 

 1996년부터는 “재팬 에코르라스트”주식회사에 고문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연구소에서 연구한 환경 및 토양 미생물과 관련하여 연구 하였던 결과물을 실제에 응용하기 위하여 수많은 실험을 진행 하였다. 특히 일본 도쿄만 사구 연구도 병행하였다. 나아가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중국을 위하여 사막방지 및 살림녹화 실험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 북경에서 세계평화상 (WPCM) 및 금메달을 수상한 필자     © 경기데일리

이러한 연구결과를 통하여 북경에서 세계평화상(WPCM) 및 금메달을 수상할 수 있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연구를 계속하여 미생물 농법에 대한 책 2 권을 한국어로 발간할 수 있었다. 2019년 초에 “미생물 농법의 패러다임(눈에 보이지 않는 생체의  위대한 활력)”란 제목의 책은 일본어로 번역되어 농문협 출판사에서 발행되어 전 일본에 보급한 바 있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나의 과학적 업적과 관련된 수많은 결과물은 일본 학자 및 업자들과 밀접한 교류협력 관계를 유지시켜 주었다. 이에 따라 영구귀국 후에도 이 같은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최근에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갑작스러운 한국에 대한 반도체 소재 3종의 수출제한과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정책으로 심각한 한일관계의 격랑이 나의 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나의 파트너 및 친지들 까지 한국에 대한 아베 총리의 정책은 많은 오류와 잘못이 있다는 말을 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일본 국민들은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 규정에 얽매여 사는 것을 싫어한다. 일본국민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 이 같은 현실이 일본 국민의 정치 참여가 선진국 중 최저 수준이다. 그러한 현상은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도 잘 나타나 있다. 선거의 투표율은 항상 50%이하다.

 

 예를 들면 2년 전 인구수 100만명이나 되는 치바시를 방문했을 때 이곳저곳에 치바시 시장 후보들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나는 나의 지인들께 어떤 시장 후보를 선택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바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의 친지들은 시장 후보들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으며 투표할 생각조차 없다고 하였다.

 

일본에서는 정부가 국민들에게 위해를 가해도 보통 시민들은 가만히 참는다. 대한민국처럼 촛불 시위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그 때문에 정치가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짓을 마음껏 자유롭게 한다.

 

예를 들면 2012년에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의 종군 위안부에 대한 왜곡과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전 도쿄도지사의 침략전쟁에 대한 망언이 뉴스에 보도된 바 있다.

 

놀랍게도 시청자들은 그 같은 사례를 신문이나 TV를 보면서 불평불만으로 끝나지 행동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정치가들은 기업들을 협박하여 비합법적인 돈을 갈취하는 것을 눈감아 주고 야쿠자나 우익단체한테서 꼬박꼬박 정치자금을 받고 있다고 한다.

 

취업률이 높지만 뼈 빠지게 근무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때그때 적당히 아르바이트를 하여 먹고 사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눈치를 보면서 잘못을 스스로 덮고 반성한다. 정부의 힘이 약하고, 파벌싸움이 잦아 일본은 중앙정부가 없어도 지방자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할아버지는 강제 징용으로 근무한 사할린 탄광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면 도주의 가능성이 있다는 핑계로 임금을 제때 주지 않았다. 주는 돈이라야 용돈 수준의 푼돈만 현금으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강제로 저축시켰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편저금이다.

 

▲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 모습    © 경기데일리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이 돈으로 전쟁수행 비용을 충당 하였다. 그러면서도 노동자들에는 저축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동원된 노무자들의 임금 중 30% 정도를 떼어갔다. 그 돈을 노무자들은 우편저금 통장으로 받았다.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은 징용노동자에 대한 보상 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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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8/29 [15:04]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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