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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문의 체험수기] 영주 귀국 사할린 동포, 前 정부도 現 정부도 외면(3)
사할린에서 온 이방인이란 싸늘한 시선에 눈물만
 
데스크 기사입력  2019/09/07 [23:08]
▲ 전학문 박사     ©경기데일리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할아버지 아베 노부유키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을 마친 후 일본군 중앙부 보직을 거쳐 1933년에 육군대장, 1939년에 일본 내각 총리로 승진하였으며, 1944년에 조선총독에 임명되어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철저히 자행하였다.


2차대전 종전 후 1945년 12월 11일에 일본주둔 미군 맥아더사령부가 아베를 신문할 때 그는 “일본 식민정책은 조선인에게 이득이 되는 정책이었다.”며“조선인은 아직도 자신을 다스릴 능력이 없기 때문에 광복 후 독립된 정부가 수립되어도 당파싸움으로 다시 붕괴할  것이다.”라고 하며, 남북 공동정부 수립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일본이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이 아니다.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은 더 걸릴 것이다.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돌아온다.”고 강조하였다. 일본 총리를 지낸 아베의 사돈인 기시 노부수케(1896-1987)는 만주국을 건설하여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철저하게 중국과 조선인의 항일투쟁을 무력화시켰다.  현재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는 바로 아베 총독의 손자이자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며,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두 사람의 피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우리민족 원수의 손자이다. 현 아베 총리의 행보를 보면 두 할아버지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그대로 이어받아 간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군국주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되어 노동에 시달렸던 어느 현장. 그곳에는 한국인의 한이 서려 있다.    ©전학문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제7대 조선총독을 역임하였던 미나미 지로(1874-1955)는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무기생산에 필수적인 제철공장에 고열량 석탄을 공급하기 위해 밭에서 일하는 젊은 농부들을 갑자기 붙잡아 트럭에 싣고 행선지도 말하지 않은 상태에서 끌고 갔다.
 
이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인간적이며 악질적인 행동으로 1938년부터 사할린 탄광으로 강제 동원하여 1945년까지 석탄채굴에 짐승처럼 혹사시킨 바 있다. 그곳에 끌려간 조선 징용인들은 말할 수 없는 수난과 고난을 겪었다.

 

나의 부모 역시 수많은 조선인 광부들과 같이 한 많은 동토의 땅 유즈노-사할린스크시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경북 의성군 비안면의 용궁 전씨 집안 출신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저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 지주들에게 땅과 집마저 빼앗겨 빈털터리가 된 뒤 홋카이도 구시로 탄광에서 9년 동안 생계를 위하여 채굴광부로 일하게 되었다. 

 

일제는 채탄작업에 대한 경험과 능력이 있고 일본말을 유창하게 잘하던 부친을 국가동원령이 실시 되기도 전인 1935년에 사할린으로 강제로 이주시킨 것이다. 그후 해방아 되었지만 일본정부는 말로는 잘 지내자고 하면서 행동으로는 달라진 것이 없다.
 
그 중에서도 잘못을 사과했다는 무라야마 담화가 있다. 이 담화는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에도 매우 유익하고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그  담화의 전문의 내용을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의 일본은 평화롭고 강성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을 두 번 되풀이 하지 않도록 젊은 세대들에게 전쟁의 비참함을 알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여야 한다. 나아가 아시아태평양 및 세계평화를 확고히 지키기 위하여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 국가정책의 잘못에 의해 일본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리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의 주민들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주었으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이를 반성하며 진심으로 사죄한다.”
 
이것은 일본의 지도자가 최초로 식민지지배와 침략을 인정하고, 이것에 대하여 사과한 것으로써 관련국들의 많은 지지를 받은 바 있다. 또한 일본 국민들로부터도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관련국들과의 관계가 크게 개선될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일본 국내의 환경이 계속되는 불황과 고베 대지진, 오움 진리교 사건 등이 발생하여 진전을 가로막았다.

 

이들 사건은 일본 사회를 엄청난 충격으로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일본 국민들을 보수적 경향으로 흐르게 만들었다. 더 큰 문제는 정치권력의 정점에 서지 못했던 무라야마 총리가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하였다. 오직 반성을 말로 표현 하였지, 그 말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무라야마 총리 이후의 모든 총리들이 그가 말했던 반성을 정책적으로 실행하지 못하고 말았다. 
  

▲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는 재식 때인 1995년 일본의 침략 전쟁과 범죄에 대해 사죄했다    © 전학문


무라야마 총리의 뒤를 이은 하시모토, 오부치, 모리 및 고이즈미 총리는 모두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겠다는 뜻을 계속 밝혔다. 고이즈미 총리 역시 2005년 8월 15일 담화에서 무라야마 담화에 나왔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바 있다.

 

호소카와 전 총리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 침략전쟁으로 큰 폐를 끼쳤다고 솔직하게 피해를 주었던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일병합 100주년에 즈음하여 칸 나오토 전 총리는 “사할린 한국인에게 성실한 지원이행”을 약속하였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3년간 이어진 일본 민주당 정권의 첫 총리로서 대표적인 지한파 정치가 하토야마 유키오는, 재직 시절은 물론 퇴임 이후에도 일제 만행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와 행보로 일본 내에서는 대표적인 지한파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징용문제에서 비롯된 한일 갈등이 최악으로 전개되고 있다"며 "그 원점은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아 그들에게 고통을 준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원점으로 되돌아가, 조속히 우애정신으로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그는 2015년에 서울의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무릎을 꿇고 사죄의 묵념을 하는 등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지론으로 피력해왔다. 
 

▲사할린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일상, 그러나 그들은 신성한 노임마저 지금까지 받지 못하고 있다.     © 전학문


그러나 이 또한 말의 성찬으로 끝났을 뿐 구체적인 행동이나 국가 정책으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실제로 일본의 지도자들은 전승국인 미국이 일본계 주민들에게 완벽한 보상을 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국이나 독일처럼 “그들이 저질렀던 과거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말만 하였지 행동이 없었다.

 

이것이 또한 현재 일본 자민당의 정책이요, 행동강령이 되고 있다. 더 문제는 이러한 아베정권의 비인간적 태도를 일본 시민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마음으로만 규탄하고 이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는 국민이 없는 것이 현실이며 한계이기도 하다.
 

▲  사할린한인은 식민지배와 남북분단, 그리고 동서 간의 냉전이라는 시대의 비극을 강제동원과 반세기에 걸친 집단억류라는 극단적 형태로 체험한 집단이었다. jtbc 한끼줍쇼 79회 '사할린' 편중에서 캡쳐  © 전학문


최근에 아베 정권은 일본의 헌법을 개정하려고 한다. 개헌의 가장 관건이 되는 일본 헌법 제9조 1항은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초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배제한다.”, 2항에는 “1항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육해공군 기타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나라의 교전권은 인정치 않는다”라는 ‘평화헌법’의 골자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일본의 정권을 잡은 우경화 정치인들은 일제강점기 때의 침략이나 그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 솔직한 반성은커녕 오히려 한국의 독도나 중국의 조어도(일본명 센카쿠쇼도) 및 러시아의 쿠릴 열도에 대한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때문에 끊임없이 주변국이나 이해 당사국들과 마찰과 긴장을 유발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한국은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한. 소간에는 국교마저 끊겨 있었다. 사할린은 한국의 주권이 미치지 못한 지역이 되었다. 이런 외적인 이유와 노동인력 상실을 우려한 소련 정부는 사할린 한인 동포를 귀환시키지 않았고 억류하였다.

 

그에 따라 현재까지도 인권 침해와 억압과 압제 아래 있다. 사할린 한인들의 문제는 오직 한국과 소련의 국교가 수립된 이후부터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전 반세기 이상의 세월은 방치된 상태에 있었다. 그 후 지난 1997년에 어느 정도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사할린 한인 피해자들이 영주 귀국길에 오른 것은 지난 2000년부터이다.

 

일본 정부의 지원으로 건설된 경기 안산 고향마을에 약 1,000명이 입주하였다. 그 후 2008년부터 현재까지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러시아 및 독립국가연합(CIS)국가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약 4,000명 이상의 동포가 입국해 국내 20개 이상의 지역에서 정착 생활을 하고 있다. 
  

▲   안산 고향마을에 있는 모자상  © 전학문


문제는 특별한 보상 없이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으로 귀환함으로써 갑자기 달라진 사회 경제체제의 적응에서 오는 고통을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는데 있다. 사할린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한국 국적취득과 함께 뒤바뀐 사회체제에의 적응과 정착생활에 숱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훌륭한 대한민국의 국민 일원이 되기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1,000명 이상이나 사망하였다. 안산시 고향 마을에 정착한 주민마저도 절반 이상이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아직도 여기에는 90세 이상 되는 초고령자가 중병으로 고생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김포시 통진읍 서암 주공 아파트로 영주 귀국한 사할린 한인 중 약 70% 정도만 생존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고령화가 가속되면 10년 후에 60년 만에 영주 귀국한 사할린 생존자는 한국에 얼마나 생존해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인생이 더없이 무상하다는 생각 외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조국에 돌아가겠다는 생각과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하다가 조국으로 귀국했지만, 그들에게는 낯설고 극복하기 힘든 차별이 존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언어와 문화적 차이로 인한 소통의 어려움과 “사할린에서 온 이방인”이란 차가운 차별이 있었다.

 

 한국 주민들의 시선은 사할린의 매서운 추위만큼 냉랭하였고, 생활은 생각보다 평탄치 않았다. 2009년 정치권에서는 사할린 한인의 귀국과 정착을 지원하는 정책과 일본을 상대로 피해보상을 추진하기 위해 사할린 특별법을 제정하려고 노력했으나,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도 표류 중이다.

 

귀국을 시작한 지 벌써 15년 이상 지나갔지만 영주 귀국을 함께 하지 못한 자녀들과의 생이별을 늘 그리워하면서 사할린 쪽 하늘만 바라보며 여생을 보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 따뜻한 시선만이라도 보내 줄 수는 없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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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9/07 [23:08]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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