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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익희 백두산 여행기 1] 중국 심양에서 만주 봉천을 생각하다
 
박익희 기자 기사입력  2019/09/21 [12:35]

이글은 지난 7월 필자의 초딩들과 백두산을 다녀온 여행기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느낌과 친구들 이름이 그대로 노출되고, 때로는 너무 솔직하게 표현을 하여 다소 거북한 표현이 있으니 양해해주시기 바라며, 3편의 졸고를 읽어주길 바란다.

1편 중국 심양에서 만주 봉천을 생각하다.

2편 하늘호수 백두산 ‘天池愛’ 빠지다.

3편 잊지 못할 '백두산 천지'를 가슴에 품고. <편집자 주>

 

지방초 20회 동기생 23명은 지난 7월 8일 7시 30분 대구공항에 집결했다.

 

도재동 회장이 취임하자 백두산 여행을 제안하여 희망자를 신청받았다.   마침내 오늘 3박 4일 일정으로  한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역사적인 날이다.

 

▲ 중국 요령성의 성도 심양공항, 옛 만주 봉천(奉天)이다.     © 박익희 기자

 

인생을 긴 여정이라 할때 우리는 경북 별고을 달고을(星州郡 月恒面)에서 태어나 지방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졸업한 죽마고우 코흘리개 친구이다.  이런 우리가 해외로 소풍을 가는 꿈 같은 날이다.

 

여행은 어디를 누구와 함께 가는 행위로 집을 나서면서부터 시작된다.  단체여행에서 동행자는 서로에게 배려하고 양보하고 협조 해야만 재미있는 여행이 가능하다.

 

오전 10시에 대구공항을 이륙한 KAL기에는 상냥한 미소와 친절한 태도로 응대하는 쭉쭉빵빵한 스튜어디스의 서비스에 만족감을 느낀다. 아울러 여행을 허락해준 나와 가족 그리고 함께하는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1시간 40분만에 도착한 중국 요령성의 수도 심양공항은 대구공항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하지만  쨍쨍한 날씨로 더웠고 ,심양공항은 웬지 무섭고 딱딱한 느낌이었다.  지문 채취와 공항검색대는 마치 여행객이 범인인양 취급하듯 까다롭게 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양손 10개 지문을 찍고 얼굴을 대조하고 모자를 벗고 온몸과 물건을 스캔당했다. 나는 대기하며 늘어선 친구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다 제지를 당했다.  테러 방지를 위해 예방조치라면 감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공항대합실에서 만난 중국 여행 가이드 이영걸씨를  따라 가서 버스에 올랐다. 여행은 설레임과 기대로 준비부터 끝날때까지 낯선 문명과 사람, 환경 등 새로움과의 만남이다.

 

이번 여정이 내겐 어떤 의미를 줄 것인지는 나의 몫이고, 가이드의 노련한 역량에 따라서 여행객의 감흥과 만족도는 달라진다.

 

조선족 이영걸 가이드는 35세의 기혼자로 길림성 연길에 살고있다며 한국 생활을 해본 사람으로 겨울에는 중국 남쪽에서, 여름에는 북쪽에서 가이드로서 사명과 책임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인사말에서 "천기를 예측하니 날씨가 좋아 천지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하지만 날씨는 하늘에서 주관하는 것이기에 100% 장담은 못한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틀릴 때를 대비하여 여지를 남겼다.

 

▲ 서탑로 불교사원 입구     © 박익희 기자

 

▲ 서탑의 사찰 모습    © 박익희 기자

 

우리는 서탑가 조선족 문화가 많이 남아있는 곳에서 식사를 했다. 서탑가 입구에 한복에 장구를 치는 여인상 조형물이 반겼다. 그런데 중국에서 처음 먹는 강산식당의 김치찌개는 실망스럽고 무성의 했다. 돼지고기는 도강을 했는지 없었고 반찬도 부실했다. 그래도 대놓고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부정적인 태도와 말은 다른 사람에게도 부정적 심상을 심기에 늘 조심해야 한다.

 

 점심 식사 후에 유리는 세계문화유산인 왕릉에 갔는데 청나라를 개국한 누르하치의 8번째 아들인 2대 황제 ‘청태종’ 황타이지의 왕릉이란다. 심양 북쪽에 위치하여 북릉이라 한다.  왕릉과 현대적 공원이 합쳐진 이곳은 중국풍의 빼어난 조각품이 많은 건물과 왕궁 같은 건물 배치와 조경이 돋보였다. 

왕릉을 지키는 코끼리, 기린, 말, 낙타, 해표가 마주보며 지키고 있었고, 인공 해자로 보이는 곳에는 작은 보트들이 있었다. 알고보니 동호와 청년호수를 아름드리 능수버들이 있어 시원해 보였다.

 

▲ 북릉 입구     © 박익희 기자

 

▲ 북릉 입구 광장 모습 용과 봉황이 날고 있는 조형물 앞에서 찰칵 한컷을 남긴다.    © 박익희 기자

 

▲ 전기차에 몸을 싣고 왕릉을 향해 출발!    © 박익희 기자
▲ 험상스러운 사자상 모습    © 박익희 기자

 

조선의 인조임금은 남한산성으로 46일간 피신했다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한번 절 할때마다 머리를 땅에 3번 찧어 이마에 피가 철철 났다. 이런 절을 세번이나 했으며 소현세자와 효종왕이된 봉림대군과 60만의 아녀자를 인질로 끌고갔다. 이런 힘없는 조선의 비극을 역사는 전한다. 국방이 안전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침략을 당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의식을 '삼배고구두례'라 하는데 당시 조선은 전쟁을 계속하자는 주전파와 화친을 하자는 주화파로 양분되었다. 삼학사라 불리는 주전파인 홍익한 윤집 오달재는 심양에 끌려와 죽임을 당했다. 주화파인 최명길과의 홍익한의 대화는 김훈이 쓴 소설 남한산성에 재미있게 묘사되었고 영화로도 나왔다.

 

 왕릉은 이미 500년 세월을 감당하기엔 쇄락했다. 건물은 낡았고 관리는 부실한 모습이었다. 다만 식물들만 세월의 더께를 대변하고 있었다. 내가 볼때는 성주출신 백년설 노래비가 있는 성주군 성박숲보다 못했다.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등을 부른 백년설(본명 이갑용)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노래로 성주 고장을 빛냈다.

 

▲ 왕릉 옆모습     © 박익희 기자

 

만주의 여진족 후금은 명나라(1368년~1644년, 277년간 왕조유지)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바꾸고 청나라(1616년~1912년)로 바꾸고  청은 257년간의 왕조를 이어갔다.

 

하지만 서구에서 물밀듯이 밀려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은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청나라는 역사의 주인으로 살아남지 못하고 아편전쟁으로 영국에게 당하고, 청일전쟁으로 일본에게도 능멸을 당했다. 일본은 만주땅 봉천(奉天)을 심양으로 개명을 하고 초기 청나라의 웅비의 기상을 잃어갔다.

 

일본은 조선을 짖밟고 청일, 러일전쟁에서 이기고, 만주땅에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은 난징대학살로 지배자로서 피지배자를 유린했다. 이는 청태종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조선을 유린했듯 역사는 승자의 기록으로  승자는 제멋대로 피지배국의 문화와 문명을 말살하고 피지배국의 백성을 노예화 한다.

 

당시 양반계급은 돈을 주고 잡혀간 아녀자를 구해왔지만, 불쌍한 민초의 아낙네와 처자는 청나라 군인에게 유린을 당해 환향녀였지만 정조를 지키지 못했기에 화냥년으로 불렸었다. 나라를 제대로 못지킨 피해는 왕이 지키는 게 아니라 백성이 질 수밖에 없는 왕권국가의 조선은 세상의 변화를 알지 못한 채 대의명분(大義名分)이 실리(實利)를 앞서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결국 시대의 흐름과 주도권을 가지지 못하는 지도자는 때로는 내부 반란으로 외침으로 혼란과 내홍을 거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최명희의 '혼불'이란 소설을 보면 한국의 역사와 일제강점기 시대에 만주땅 봉천 지금의 심양에서 독립을 꿈꾸며 살았던 사람들의 애환과 곤궁한 이야기 나오는데 한국인이라면 꼭 한번은 읽어봐야 할 책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갈파했다.

 

 우리는 독립운동을 하며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와도 이를 극복한 숭고한 선열의 넑과 정신을 높히 사고 기억해야 한다. 그중에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지청천, 김좌진, 홍범도, 최재형, 이승만, 김구, 이동영, 이상룡 등 수많은 독립지사가 독립를 위해 목숨까지 버렸다. 성주의 백세각에서 독립의지를 불태우고 만주로 간 이승희, 김창숙 등의 지사도 잊을 수 없다.

 

그런데 공산주의자 김원봉을  애국지사로 만들 꼼수를 부린다고... 만약 이렇게 된다면 역사를 부정하고 날조하는 것으로 한마디로 공산주의자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그런 사람과 세력이 현재의 국가 지도자라면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는 짓이다.

 

우리 일행은 북릉의 주요 유적지을 약간은 걸었고 대부분은 전동차량을 타고 주차간산(走車看山)식으로 휙 지나가며 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심양 날씨가 35℃ 넘는 무더위였다. 만약 전동차를 타지 않았다면 땀범벅이 되었을 거다.

 

▲ 왕릉 봉분에 자란 나무     © 박익희 기자

 

왕릉 봉분에는 큰 나무가 볼품없는 모습으로 서있고, 왕릉 뒷편의 숲은 관리가 안되고 있었다. 내눈에는 외화내빈(外華內貧)의 현장으로 비쳐졌다.

 

우리나라 정자각인 듯한 곳에서 위패를 보았고 비각에서는 엄청난 용머리와 거북등에 세겨진 대리석에 새겨진 홍타이지의 비문과 비석에 새겨진 용조각을 보았다. 청태종이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남겼어도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번 지방초등 20회 동기회는 첫 해외 단체여행으로 주목적이 한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를 보고 감흥을 느끼는 것이다.

 

▲ 왕릉 산책길에서 본 왕릉 건물 전경     © 박익희 기자
▲ 왕릉 단체사진     © 박익희 기자

 

그래서 인구 230만명 심양시내 번화가의 화려한 건물과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훈강을 뒤로하고 백두산 길목에 있는 통하시로 일행을 태운 버스는 멋지게 뚫린 길을 전세를 낸듯이 달려갔다.

 

중간에 용변을 보기 위해 세운 화장실 달린 곳은 출입을 금지하는 금줄이 쳐져있고 닫혀져 있어 우린 어쩔수 없이 꽃밭뒤에서 소변으로 거름을 주었고, 여성들도 용기있게 숨어서 볼일을 보았다.

 

몇년 전의 중국과는 판이하게 발전해 있는 모습이었고, 심양은 서울보다 큰 건물이 많은 것 같았고  지금도 건축 중이었고 자동차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가끔씩 현대차나 기아차가 보였다. 그런데 중국의 화장실은 천지개벽을 했다.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한국의 선진 화장실 시설을 모방했다.

 남자 화장실에 구호는 한국에서는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이라 표현했는데,  중국은 "한 발을 앞으로 간다면  중국 문명이 크게 나간다"는 거창한 구호를 걸었다.  중국은 무엇이든 거창하고 중화사상으로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자부하고 뻥이 하늘을 찌른다. 아무튼 중국은 뻬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무섭게 변하고 있다.

 

▲ 화려하고 세밀한  돌조각 상     © 박익희 기자
▲ 왕릉 입구 사자상     © 박익희 기자

 

▲ 왕릉 주변의 호수     © 박익희 기자

 

차창에 비친 만주땅은 넓고 넓어서 끝이 없이 펼쳐졌다.  원시림과 잘 포장된  깨끗한 길을 달리며 나는 땅덩이가 정말 크다는 것을 실감했다. 가이드는 중국 훈춘까지 시속 400km로 달리는 고속철도가 개통되어서 고속도로가 텅 비워졌다고 설명했다.

 

중국은 각자도생(生)하다가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넘었고 이제 굴기(崛起)하면서 중국몽(中國夢)으로 일대일로( , One belt, One road)주창하며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함께 G2국가로 우뚝 섰다.

 

달리는 차창 밖에는 옥수수밭과 벼농사를 짓는 논과 황색의 가옥이 평화로워 보였다. 구릉으로 된 밭에는 인삼재배 시설이 끝없이 펼쳐졌다.  중간에 용변을 위해서 한번 더 정차를 했는데 수퍼에는 각종 먹거리가 즐비했고 그곳에서 아이스께끼를 사와서 1960~70년대의 한국의  형편을 회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 채리와 사과가 있었고 망고가 있었다. 대구 사과가 중국 통화까지 생산되고 있구나. 사과의 재배 한계 위도는 과연 어디일까. 나는 강원도 양구 펀치볼과 경기도 가평에서 과수원에서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것을 보고 놀랐었다.

 

그런데 차안에는 언제 준비했는지 지참한 소주에 꾸리꼬리한 내음이 나는 황태포 안주를 먹으며 각자의 삶을 얘기하고 듣는 소통의 시간을 가졌다.

 

대구공항에서 미리 준비해간 도시락 덕분에 통화를 하고 카톡을 주고받는 일은 가능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어떤 여자 동창생이 “도시락은 언제 까먹느냐”며 성화가 이만저만 아니다.

 

"웬말 프라스틱 전자제품을 까먹어?  유 국장의 "카톡과 국내전화를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유기"라는  설명에 모두가 요절복통이다.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변하여 정신을 안 차리고 따라가지 못하면 시대적 퇴물로 전락하고 용도폐기 신세가 된다. 아 불쌍한 남자들의 신세여! 아 그리운 옛날이여!

 

철산 출신 이상분이는 자유시간 2개와 사탕 서너 개를 배급했는데 나는 고마움과 우려를 동시에 했다. 그녀가 지팡이를 짚고 왔기에 건강이 염려되었고 백두산에 오를 수 있을까 걱정했다.

 

백두산을 올때는 인력거를 탈 생각을 하고 왔다며 밝힌 친구들이 서너 명 있었다.

누구나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는 철칙이지만 육체적인 건강한 삶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하고 아프면 병원에 신세를 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쌍팔년(1955+2333=4288년) 베이붐세대 시작을 알린 지독한 가난과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겪은 우리는 스스로의 건강한 삶이 되도록 해야만 한다. 더 이상 자식의 봉양을 기대해서도, 자식에게 의지해서도 안되는 세대이다.

 

▲ 지방초딩 20회 일행과 도재동 회장 및 유진역 사무국장 모습    © 박익희 기자

 

모든 진행에 능수능란하고 탁월한 능력을 갖춘 유진억 사무국장은 저마다 나와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구수하고 인간미가 물씬 나는 소통 시간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가슴을 열고 진한 감동을 주었다. 차 안에는  웃고 떠들며 여행의 자유로움과 흉금을 터며 동화되어 금세 긴 세월의 공백을 뛰어넘어 다체동심(多體同心)이 되었다.

 

도재동 회장은 "백두산 소풍을 제안하고 결정하며 날마다 기도를 했다. 참가를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참여한 자발적인 점을 높이 사고싶고, 함께 하지 못한 동기생의 사정을 헤아리고 미안함을 표시한다"고 말했다.  모두가 도 회장의 인품의 고결함을 느끼고 따뜻한 인간미와 배려심에 경의를 표했다.

 

유복환 전임 회장은  백두산의 상식적인 얘기로 사전 지식을 알고 등정을 하자고 조용한 가르침을 주었다. 나는 복환이에게 퀴즈를 맞추면 포옹을 해주라고 흰소리를 했다. 그때부터 여성들의 호응은 뜨거워졌다.

 

인물 좋지, 공부 잘하지, 달리기도 잘하지 못하는 게 없었던 금상첨화(錦上添花)의 조건을 갖춘 우리들의 우상 유복환이었다. 멋진 선그라스를 끼고 있는 모습이 정말 유명한 스타였다. 지금도 그는 방송통신대 법학과 동기들과 소풍을 간다고 넌지시 귀띔을 했다.

 

▲ 백두산 지도     © 박익희 기자

 

그는 백두산의 둘레, 깊이, 봉우리 등에 대하여 사전에 알려주었다. 아마도 역사문화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이기에 그랬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번 백두산 여행에 전심전력으로 올인한 유진억 사무국장은 “도 회장과 유복환 장로님는 소풍날을 받고 되도록 날씨가 좋고, 무사무탈 하도록 매일 기도했다”고 밝혔다. 세상사 지성이면 감천이고, 진인사대천명이 순리임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나도 마이크를 잡고 이번 모임의 의미와 각오를 얘기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 신단수에서 환인 환웅 단군이 대를 잇고 고조선을 세우고 '홍익인간 재세이화(弘益人間 在世理化)'를 이루는 나라를 건설했다고 얘기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려 교화 시킨다'는 뜻이다.

 

울산에서 온 한경섭이가 소박한 이야기를 헀다. 타관객지 45년에 고향 친구들이 제일 좋더라고 고백을 했다.  그는 지난해 울산에서 지방초등 20회 모임에서 일체의 경비를 부담하여 인품의 훌륭함과 경제력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데 돈이 없어도 할 수 있는 무재칠시(無材七施)로 마음이 부자인 노년이 되면 정말 좋겠다. 무재칠시는 화안시(和顔施), 언시(言施), 심시(心施),신시(身施), 안시(眼施), 좌시(座施), 찰시(察施)를 말하는데 한 마디로 하면 돈이 없어도 몸과 마음으로 베풀라는 말이겠다.

우리는 4시간을 버스에 몸을 실고 통화시로 왔다. 우리는 통화시에서 전신마사지를 1시간 가량 받으며 색다른 체험을 하며 자본주의의 사회에 돈의 위력으로 피로를 풀었고 돈의 소중함을 실감했다.

 

나는 시골에서 농토를 지키며 멋지게 사는 이기용이와 같은 방에서 중국 여성으로부터 맛사지를 받았는데 뭉쳐있던 근육과 지친 심신이 이완되고 재충전되는 것 같았다.

 

중국사람으로부터 전신 마사지를 받으며 격세지감과 한국의 국력신장을 느꼈다. 예전 같으면 생각하지도 못할 호사를 누리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우월성을 체험했다.

 

▲ 만찬장에서 분위기는 달아오르고 푸짐하게 먹고 마셨다.     © 박익희 기자

 

다음은 저녁 만찬이 준비된 곳으로 갔다.

샤브샤브로 준비된 식당에서 40도 고량주와 중국 맥주로 점심의 부실한 허기를 채우며 도 회장과 도재철의 건배로 후끈한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했다.

 

나는 "노발! 대발!(노인이 발기하면, 대한민국이 발전한다)"는 뜻으로 건배사를 했다.

 

중국의 인터넷 환경이 다음이나 네이버는 연결되었지만  구글은 먹통이었다. 중국은 아직 경제는 개방되었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아직 시기상조인가? 아니면 미국과의 경제전쟁의 해결책이 요원한가? 내일이 걱정이다. 다행하게도 도시락이 신통한 위력을 발휘하여 대만족이었다.   

 

▲ 통화시의 야경     © 박익희 기자

 

우리는 미리 예약된 통화순풍호텔에서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던 지친 몸에 재충전를 위한 하루 일정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런데 이날 밤  요절복통의 토픽 사건이 생겼고, 에어컨 대신에 창문을 열고 잤는데 중국의 낮은 공중도덕과 민도를 가늠할 수 있는 자동차 클랙슨 소음공해에 시달렸다. 그래서 하얀 밤이 되고 말았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백두산 여행기(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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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9/21 [12:35]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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