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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익희 백두산 여행기 3] 잊지 못할 '백두산 천지'를 가슴에 품고
 
박익희 기자 기사입력  2019/09/21 [20:17]

 즐거운 시간은 빨리 가는 것 같다. 벌써 이틀 밤을 보냈고, 내일은 심양에서 하룻밤를 더 자고 아침 식사 후에 바로 공항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오늘이 실질적인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  서파코스에서 본 백두산 천지 모습, 지난 7월 9일과 10일 백두산 천지를 두번이나 보는 행운을 누렸다. 천지의 물은 맑고 푸르렀고 하늘의 구름을 투영시키고 있었다.   © 박익희 기자

 

호텔에서 가방을 챙겨나와 버스에 실었다. 운전기사님가 저기서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우리는 백두산 장백폭포에서 내려오는 비류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물레방아도 있었는데 돌아가지는 않았다. 중국에서는 대주점을 호텔이라고 한다고 남인화가 알려주었다. 우리 일행이 머물렀던 숙소 뒤편에서 셔틀버스가 왔다.

 

▲     © 박익희 기자

 

오늘도 날씨가 쨍하고 아침 햇볕이 따가울 정도였다. 오늘은 입장권이 2장이라며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한다고 가이드가 말했다. 잃어버리면 안된다며 회수한 여권과 함께 입장권을 배부했다. 우리는 지그재그로 만들어진 대기 시설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마침내 버스가 왔다.

 

장백산 서파 코스를 가기 위해 약 40분을 원시림을 지나며 백두산이 과연 크다는 것을 실감했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입장권을 제시하고 다시 다른 셔틀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이는 큰 차가 고도를 높이면 코너링 위험하기 때문일 것 같았다. 어쩌면 원시림을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의 도로를 건설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장백산 개표소     © 박익희 기자

 

그런데 장백산 개표소에서 어느 여성이 사색이 다되었다. 입장권을 분실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차분하게 기다리고 냉정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가이드가 못 갈 수 있다는 말에 더욱 당황하고 놀란다.

 

지혜로운 도재동 회장이 가이드에게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며 점잖게 충고를 했다. 가이드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여 해결되었다. 이 때문에 약 20분가량이 소요되었다. 가능한 방법이 없다면 천지를 안 보면 되고, 다시 입장권을 구입하면 될 텐데 세상만사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평소의 내 삶의 방식이다.

 

우리는 버스를 3번 갈아타고 서쪽 언덕이란 뜻의 서파(西坡)코스 마지막 정거장에 도착했다.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버스는 서로 양보하고 비켜주는 운전 매너로 북파코스와는 사뭇 달랐다.

 

▲ 아직도 천지주변 능선에는 눈이 녹지 않고 있는 듯 하다.    © 박익희 기자

 

버스가 잠깐 설 때마다 주변을 살펴보니 과연 고산화원(高山花園)이란 말이 틀리지 않았다. 여러 가지 야생화가 눈앞에 펼쳐졌다. 나무가 자라지 않은 고도에서부터는 온갖 야생화가 쫙 깔려있는 있었다. 높은 산에서 볼 수 있는 정말 멋진 풍광이다.

 

▲ 서파 코스로 천지에 가는 길에 만발한 야생화 모습     © 박익희 기자
▲ 천지 가는 길에 핀 꽃, 노란 만병초     © 박익희 기자

 

내가 아는 꽃이름은 고작 매발톱, 엉겅퀴, 아이리스, 민들레, 노란 만병초 등이었지만 꽃들은 저마다의 모양과 색깔과 향기로 벌과 나비를 유혹하고 번식하는 데 그 생태계가 실로 신묘하다.

 

아침에 개화하는 종류도 있고, 가짜 꽃을 피우며 유혹하는 종류도 있으니 자연의 신비함과 경이로움은 말할 수 없이 많다. 그래서 자연을 위대한 스승이라 부른다. 때가 되어야 피고 조건이 맞아야 식물도 번식한다.

 

▲ 서파 코스의 마지막 정류장을 뒤로하며 거대한 원시림을 보면서 1442게단을 오르는 많은 백두산 관광객들 모습     © 박익희 기자

 

나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어서 빨리 가서 天池사랑에 빠지고 싶었기에 선두에 섰다. 젊은 시절 산을 다닌 경험이 큰 힘이 되었다. 1,442계단을 거침없이 오르다가 가끔 사진을 찍고 일행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잠깐씩 기다렸다.

 

인력거가 5개 정도 보였다. 우리 일행 중에 저 인력거를 탈 수 있을까? 관광객 숫자에 비해 인력거의 숫자가 적은 편이었다. 인력거는 나무로 만들어 장정 두 사람이 어깨에 사선으로 줄을 매고 손님을 대나무 의자에 태우고 가파른 길을 오른다. 물론 왕복 비용은 600~700위안으로 비싸다. 그래도 다리가 아픈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운송수단이다.

 

▲ 천지를 오르는 가마 모습     © 박익희 기자

 

연세 많은 부모를 모시고 오는 분, 친지와 오는 사람, 친구와 오는 사람, 동네 사람들과 계모임 등 목적도 가지가지였다. 나는 일행 중 제일 먼저 천지에 올라서 황홀한 백두산 천지 전경과 주변의 산봉우리와 산아래 광활하게 펼쳐진 만주벌 간도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고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았다.

 

▲마천루(왼쪽 바위산) 엄청난 관광객이 백두산 천지를 보기 위해 오가고 있었다.     © 박익희 기자
▲ 백두산 천지에서 흐르는 물     © 박익희 기자

 

천지신명(地神明)이시여!

오늘 제가 백두산 천지에 올 수 있는 건강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틀 연속 천지의 볼 수 있게 날씨를 허락하심에 고맙습니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마음 속으로 으로 기도를 했다.

나와 가족, 공동체를 위하여, 나라를 위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정직하게 살자고 다짐했다.

 

▲백두산 천지 모습     © 박익희 기자

 

천지에 물은 쪽빛의 그랑블루로 오늘도 고요했고

얼마나 깊은지를 가늠할 수가 없을 만큼 맑았다.

어떻게 저처럼 맑은 물이 해발 2,200m에 가득 고여 있을까?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그런데 전망 좋은 주요 포인트는 막아서 돈을 받고 입장시키고 있었다. 아무튼 중국의 상술은 상상을 초월한다. 낭떠러지에 난도를 내어 길을 내고, 인간의 범접을 막는 자연에도 엘리베이터를 놓아 기겁하게 만든다. 대협곡을 막아서 샨샤댐을 만들었다고 자랑한다.

 

▲ 천지에서 춤추는 중국인들     © 박익희 기자

 

서파 코스가 계단이 많아 오르기는 힘들어도 북한과 가깝고 정계비가 있는 곳이다. 조선 숙종임금 때인 1712년 중국의 목극동과 조선의 관리가 나라의 경계를 정하는 경계비(境界碑) 또는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이때 청나라 관리 목극동은 “백두산의 물은 주지만 천하대지는 줄 수 없다”고 본래 조선과 중국의 경계였던 토문강을 중국이 차지하고 두만강에 경계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는 힘없는 나라의 설움이고 강자의 횡포이다. 국가 간의 역사는 힘으로 지켜지기에 국력이 얼마나 중요하며, 국가안보가 곧 평화임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 만주벌 서간도와 북간도     © 박익희 기자

 

백두산 영토 및 국경 문제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환웅(桓雄) 천왕이 환인(桓因) 천제로부터 天符印(청동검, 청동방울, 청동거울)을 가지고 내려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옛날에는 백두산을 태백산으로 불렀으며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 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聖山)·신산(神山)으로 숭앙 되어 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다.

 

백두산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북방 이민족의 정신적 구심점과 활동무대가 되어왔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국경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거주를 제한하는 봉금정책(封禁政策)을 실시했다. 그래서 섬 아닌 섬으로 만주땅을 북간도와 서간도로 불렀다.

 

▲ 백두산 정계비 영토 주장     ©박익희 기자

 

그러나 조선말기에 국가기강이 무너지자 조선의 양민들이 탐관오리의 수탈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개척하자 백두산을 그들의 영토로 귀속시키려고, 1712년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그 내용 가운데 토문강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청나라와의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했으며, 간도 및 녹둔도의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09년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두만강이 국경선으로 결정되었으며, 지금 백두산은 천지(天池)까지도 분할되어 천지 북쪽 2/5는 중국측에, 남쪽 3/5은 북한측에 속한다.

 

송화강과 두만강, 압록강의 발원지를 끼고 있는 백두산은 필연적으로 중국과 한국 두 국가로 나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문제는 일제의 조선반도 침략 이전엔 백두산 전체가 우리 땅이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원래 두만강 이북의 간도는 우리의 영토(‘백두산정계비’)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본이 철도부 설권에 대한 협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간도를 중국영토로 편입시킨 것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학계 전문가들은 “이때부터 중국과 백두산 영토를 공유하게 됐고 이는 곧 일제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인 이야기는 김산호가 그린 대조선제국사(대쥬신제국사, 동아출판사)에 보면 잘 나온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 북한과 중국 간의 담판 과정에서 백두산의 절반이 중국으로 넘어간 것은 이미 그때였다는 뜻이다.

 

1982년 6월 21일자 국내 신문에는 백두산 천지의 북쪽부분 거의 절반이 중국영토로 표시된 중국발행의 지도와 기사를 보도하여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 한민족의 영산 백두산     ©박익희 기자

 

중국 지린성 창바이산 자연보호관리국에서 간행한 《자연보호》라는 소책자에 수록된 백두산 부근 지도는 동쪽의 비류봉(沸流峰)에서 남서쪽 마천우(麻天隅)를 향해 일직선으로 줄을 그어 ‘국계(國界)’라는 국경선 표시를 하고 있다. 북한은 1962년 초부터 1963년 4월까지 국경선 비밀협상을 벌여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은 밝혔으나 백두산에 대해서는 일절 발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튼 나는 단군 성조께서 BC 2333년에 고조선의 국가이념을 홍익인간을 실현하겠다는 웅대한 뜻을 선포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려면 지혜와 힘을 갖고 불의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응징을 해야 가능할 것이다.

 

인격 없는 지식, 도덕성 없는 상업, 노력 없는 부, 인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기도, 원칙 없는 정치를 죄악이라고 설파했던 간디의 철학처럼 우리 민족에게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거룩한 국시를 내린 단군 성조가 자랑스럽다.

 

아울러 이 기회에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에게 다시 감사를 드린다. 중국의 한자(漢字)에 비하면 얼마나 한글이 간명하고 배우기 쉽고 표현하기 쉬운 게 얼마나 큰 자부심인지 모른다. 물론 우리말의 약 70%가 한자어로 한자를 제대로 알아야 속뜻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최소한의 한문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

 

어제 올랐던 북파(北坡), 오늘 오른 서파(西坡)란 말을 고개, 언덕을 말한다. 북쪽 언덕길, 서쪽 언덕길이란 뜻이다.

 

▲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단체사진     © 박익희 기자

 

한참을 기다리니 일행이 올라왔다. 모두가 천지를 보고 너무나 감격에 겨워했다. 기념으로 개인 사진을 찍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천지 주변에 상당한 공간이 있어 중국인들이 무용을 시작했다.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장백산 정상에서 그들은 춤을 추고 기뻐한다. 마치 선녀라도 된 듯이 통일된 유니폼을 입고서 춤사위를 선보였다.

 

우리의 전통악기 퉁소를 가져와 아리랑을 연주했다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천지 주변에는 간단한 음료를 팔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도시락을 싸 와서 먹기도 했다. 천지 주변과 오르고 내리는 길에는 자연을 자키고 청소하는 사람들이 울타리를 넘어가면 벼락같은 호통을 쳐서 쫓아냈다.

 

나는 천지에서 <경기데일리> 독자에게 전할 동영상을 찍었고, 도재동 회장의 제안으로 회장을 모델로 영상을 찍으며 즉석 멘트를 했다. 나중에 보니 너무나 감격한 영상이라 약간 부끄러웠다.

 

나는 남이 장군이 읊었던 북정가 (北征歌)란 시가 생각났다.

 

북정가 (北征歌)

-남이(南怡 세종 23 - 예종 1, 1441-1468)-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백두산의 돌은 칼 가는데 쓰고,

頭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 두만강의 물은 말 먹이는데 쓴다.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남아 이십 세에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겠는가?

 

이 시를 읽으며 남이장군의 호방한 기개와 큰 그릇임을 알 수 있다. 역사는 이런 인물을 그냥 두지 않고 음모를 꾸며 죽인다. 세조 임금때 이시애가 북관에서 난을 일으키자 강순의 부하로 남이가 참가하여 평정했다. 강순은 영의정이 되었고, 남이는 27세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런데 한계희, 유자광 등이 모함하여 남이 장군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데도 강순은 이를 변호하지 않았다.

 

이들은 남이 장군의 북정가 3째 단락의 平자를 得자로 바꾸어 집요한 모함을 했다. ‘남아 이십에 나라를 얻지 못한다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겠느냐’는 역모의 뜻이라며 정적을 죽였다.

 

형장(刑場)으로 가는 수레에서 강순(康純)이 남이에게 "왜 나를 억울하게 죽게 하느냐" 고 묻자, 남이는 “영의정 자리에 있고 나이 80세로 살 만큼 산 사람이 함께 평정한 부하의 억울함을 보고도 몸을 사려 한마디 변호도 하지 않은 불의는 죽어 마땅하다”고 말했다. 강순은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 백두산 마천우     © 박익희 기자

 

▲ 고산화원    © 박익희 기자

 

▲   백두산 아래 휴게소에 있는 과일들  © 박익희 기자

 

우리는 하산하여 고산화원(高山花園)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왔다. 화장실 건너편에 고산화원이 있었는데 화장실을 가라며 잠시 쉬었다가 간이 화장실만 갔다가 그냥 왔다.

 

그 다음은 장백산 금강대협곡을 걸었다. 금강대협곡은 명불허전(名不虛傳) 자체였다. 울창한 원시림을 낀 대협곡은 엄청난 규모였는데 백두산에서 화산활동으로 마그마가 할퀴고 간 흔적이 기기묘묘한 바위로 억겁의 세월을 품으며 펼쳐지고 있었다.

 

▲ 장백산 금강대협곡 입구     © 박익희 기자

 

협곡 주변의 데크를 약 30분간 조심스럽게 걸었다. 주변에 다람쥐도 있었고, 아름드리 나무가 쓰러져있는 곳도 있었다. 산새소리들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울울창창한 삼림이 있었고 수많은 생명체가 대자연에 기대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일행 4명이 도착 시간이 되어도 오질 않았다. 길은 외길로 위험할 것도 없었고, 길을 잃은 곳도 아닌데 다리가 아픈 도재철과 여성 3명이 행불이니 난감했고 초조해졌다.

 

▲금강대협곡과 울창한 원시산림     © 박익희 기자

 

나는 도재동 회장과 한경섭과 함께 찾아 나섰는데 그들은 태연히 기념품 가게에 물건 사느라 정신이 팔려있었다. 나는 손에 등산지팡이를 든 빨간티셔츠를 입은 친구를 못 보았느냐고 물었고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도 회장은 행불된 친구를 발견하고 안도의 타박을 주었다.

 

그래도 정해진 시간을 넘지 않았기에 용서가 되었다. 도재철은 딸이 사준 선글라스를 어제 장백폭포를 보고 의자에 두고 왔는데 딸의 선물이라 무척 애착이 가는 듯했다.

 

우리는 마지막 만찬을 쇠고기와 송이버섯과 산삼주와 백주로 배부르게 먹었다. 송이버섯이 장백산 주변에 많이 나는 것을 보니 과연 소나무가 자라는 곳 백두산은 우리의 옛 영토임이 분명한 것이다.

 

▲ 백두산 송이버섯과 불고기     © 박익희 기자

 

돌이켜 생각해보면 중국령 장백산에서 천지를 보았는데 나는 백두산 천지라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백두산은 한민족의 태동의 성지이고. 백두대간의 출발점이고 영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왜 백두산을 못 오르게 하는지 궁금하다. 무엇을 못 보여준다는 말인가. 북한령 백두산 가까운 곳에 공항을 만들고 관광시설을 만들면 엄청난 관광수익이 오를 텐데 말이다. 국민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정권은 어떤 경우라도 용서받지 못할 엉터리 국가이고 엉터리 정권이다.

 

지옥 같은 북한을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탈북민의 실화를 들으면 눈물이 나고 한숨이 난다. 어떻게 공산주의는 인민을 해방한다면서 자유를 통제하고 압제로 거주 이동의 자유와 인권을 말살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 백두산 하산 후 단체사진     © 박익희 기자

 

각설하고 우리 일행은 저녁 만찬 후에 만주 봉천땅으로 4시간을 이동하여 왔다. 그런데 차창밖에는 무더위를 식혀주는 비가 오고 있었다. 우리는 여행도 무사히 끝났고 이번 백두산 여행에 모두 대만족을 했고 안도를 했다.

마지막 호텔은 뒷문으로 들어오면서 으슥한 느낌을 받았는데 정면에서 보니 4성급 호텔로 시설이 좋은 편으로 아침 식사도 좋았다.

 

▲ 백두산 서파 코스에서 필자    ©박익희 기자

 

3박 4일의 일정을 마치고 대구공항에 도착하여 공항대합실에서 모두 손뼉를 치며 해단식을 했고 나는 서둘러 도시락 3대를 반납하고 동대구역으로 택시로 이동하여 수원행 차에 몸을 싣고 귀가를 했다.

 

그런데 친구와 마시기 위해 산 북한술 금주(金酒) 병마개가 허술한지 여행용 가방 안에 새어서 술냄새와 오줌 내음에 썩여 가방꼴이 말이 아니었다.

 

아내는 “술 대신에 송이버섯을 사 오지 그랬어요”고 말하는데.... 나는 차마 여행 첫날 빅뉴스를 말하지 않았고 세탁물만 내놓았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려거든 여행을 하라!'는 명언을 생각하며 나는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여행기를 마무리 한다. 두서없이 쓴 졸고를 읽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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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9/21 [20:17]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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