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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익희의 실크로드 답사기 6]둔황! 찬란한 불교유적의 보고 '막고굴(莫高窟)'
 
박익희 기자 기사입력  2019/12/25 [13:36]
▲ D6 일정표     © 박익희 기자

좋은 친구들과 함께 여행하는 시간이 너무도 빨리 지나는 것 같다.  이국 땅에서 세계유산을 보는 기회는 흔치 않다.

 

평소 여행과 등산을 좋아하는 나는 이런 기회를 즐기고 하나라도 더 보고 사진으로 간직하고 싶은 심정이다.

 

오늘은 여행 6일째로 실크로드 답사여행의 제일 유명한 막고굴(莫高窟) 불교유적을 보러간다.

 

사막의 굴 속에 세운 34m의 대불과 찬란한 불교유적, 고선지 장군과 신라승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막고굴을 가는 날이다.

 

호텔에서 막고굴은 그렇게 멀지 않았다. 아침부터 어디서 왔는지 막고굴에는 엄청나게 몰려온 관광객들로 붐볐다.

 

막고굴에는 표를 사서 QR코드로 인식하고 난 후 입장하기 위해 줄을 많이 서있다. 박동광 가이더는 무슨 특권이나 가진 듯이 다른 곳으로 가서 뭐라 말하더니 바로 입장이 되었다.

 

어쩌면 의사출신 답게 사람의 병세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처방하여 병을 쉽게 낫게하는 명의처럼 박동광 가이드는 훌륭한 일처리 솜씨로 우리는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아마도 중국의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입장권도 조금 비싸고, 외국인을 위한 통과를 간편하게 하는 게 중국의 관광수입에도 기여하지 않을까 해서 마련한 정책이리라 짐작해 본다.

 

입장을 하자 먼저 1관을 약 20분간 입체적인 영상관에서 둔황 막고굴의 역사와 불교유적의 엄청난 유물을 VR기술을 동원하여 보여주었는 데 이는 한국보다 훨씬 앞선 첨단 기법으로 나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1관 상영후 2관으로 옮겨 보다 입체적인 화려한 불상과 벽화의 채색, 시대별로 어떻게 변하고 보존되었는지 중국에서는 어떻게 관리하고 어떤 순서로 보아야 하는지 실제 문화유적을 보기 전에 사전에 교육시키고 관람 예절을 가르치는 과정이었다.

 

나는 세계 최고라는 삼성 스마트폰으로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 영상관에서 본 스팩터클한 영상은 오디오와 음향효과를 넣어서 훌륭했고 관람시설도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중국이 전세계의 돈을 버는 기술과 마인드를 확실히 터득하고 실행하고 있었다.

 

▲둔황의 막고굴(莫高窟)     © 박익희 기자

 

우린 전동차를 갈아타고 둔황의 막고굴(莫高窟) 입구로 갔다. 막고굴은 길이 1.8km에 약 492개의 굴이 층층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사막지역에 이런 불교유적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이곳 에도 물이 있고, 가까운 곳에 사막의 오아시스 월아천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여기서부터 우린 중국의 전문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했다. 중국의 가이드는 출중한 미인에 멋쟁이 여성이 친절하게 한국말로 통역기 작동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유샨으로 사천성 출신으로 북경으로 유학을 가서 사학을 전공한 여성이었다. 한국말은 완벽하게 구사하지는 못했지만 잘하는 편으로 의사소통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녀도 우리의 일행이 어떤 부류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가 안내하는 8개굴을 보았는데 우리의 지식 수준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고 불교에 대하여 신나게 얘기했고, 우리도 때로는 수긍하고 질문을 했다.

 

대구고 14산악회 이동한 회장이 불교에 많이 알고 있었고, 양근식 교장도 불교학교인 능인고 교장 출신답게 불교에 해박했다.  무엇보다 우린 한문을 조금 아는 편이었고,  한문은 곽문현이가 박식했다. 그녀도 우리의 학습태도와 수준에 마음이 드는지 강의 수준을 높히고 우리를 높게 평가했다. 그러니 해설원 유쌴은 자연스럽게 학습 분위기는 고조되고 더욱 자세하게 설명을 했다.

 

▲ 둔황의 막고굴(莫高窟)      © 박익희 기자

 

그녀는 원칙적으로 사진 촬영이 안되지만 사진을 몰래 찍어도 눈감아 주었다. 우리는 고구려 복장과 사막에 한가운데 어떻게 이런 유적이 1500여년을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궁금하고 의구심이 갔다. 어쩌면 척박한 사막이기에 쉽게 눈이 뛰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유적은 마치 거대한 고대의 불교미술 유물관으로 전체가 훌륭한 불교유적이 었다. 어떤 곳은 불상, 선굴, 전당굴, 탑묘굴, 영굴로 부처님 주변의 보살과 화려한 채색벽화 복장, 진흙을 잘섞어 아름답게 만든 소조와 부조로 만든 진귀한 불교유적의 찬란함에 나는 깜짝 놀라고 또 놀랐다.

 

부처와 문수와 보현보살 아난, 가섭 등의 십대제자, 나한, 천왕, 금강, 역사 등의 한국불교의 원조들이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구법을 위해 혜초스님, 자장율사, 신라의 왕자출신 김교각 스님, 의상스님이 이 원류를 찾아 당나라로 먼길을 왔었구나 싶었다.

 

왕오천축국전이 이곳 막고굴에서 발견되어 프랑스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니 언제 우리의 문화유산을 찾아올 수 있을까?

 

당 고종의 부인 측천무가 스스로 세운 불상 34m는 크기와 매끄러운 처리와 채색은 금방 만든 것 같았다.

 

둔황(敦煌)은 고대 동서양 교류의 요충지로 실크로드로 가는 통로였던 곳이다. 기원전 11년 한나라 무제가 이 곳의 흉노를 무찌르고 동부에서 한족을 이주시켜서 서역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그 후 동서양의 문물이 교차되고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가 이곳 둔황을 거치면서 독특한 둔황의 문화를 이룰 수 있었다.

 

특히 당대 7세기부터 8세기 중엽에 걸쳐 가장 왕래가 성해 동서무역의 중계지점으로서 문화의 꽃을 피우며 세계적인 '둔황예술'을 창출했다.

 

▲ 둔황의 막고굴(莫高窟)     © 박익희 기자

 

1900년에 발견된 막고굴(莫高窟)은 명사산(鳴沙山) 동쪽 절벽에 남북으로 약 1.8㎞에 걸쳐 조성된 석굴군이다. 일명 천불동으로 불려지는 막고굴의 석굴은 약 1천여 개. 그 중 492개만이 발굴돼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막고굴은 상하 5층으로 불동(佛洞)이 분포되어있다. 전진(前秦) 건원(建元)2년(366) 승려인 낙준이 개착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당 경력(經歷) 원년(698)에 이회(李懷)가 막고굴을 중수하여 굴 안에 있는 감실 1천 여개를 발견했다.  오대, 송, 서하, 원 시기를 거치면서 모두 증건했다고 한다.

 

492개 동굴마다 빈틈없이 그려진 벽화들로 해서 동양미술의 뿌리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막고굴 벽화의 내용은 초기에는 민간신화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그 후 불교가 전해지고서는 석가의 선행, 열반상 그리고 사후 극락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또한 막고굴에는 중국 문화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당나라 때 불상 중 걸작으로 손꼽히는 제45굴의 칠존상을 비롯해 제57굴의 보살 벽화, 제158굴의 열반상, 제285굴의 비천도 등이 주목을 받는다.

 

특히 장경동(藏經洞)이라 불려지는 제17굴은 송대까지의 경전이나 문서가 보관되어 있던 곳으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바로 이곳 17굴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둔황의 막고굴이 발견된 이후 당시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영국, 프랑스, 일본 등에서 이곳의 자료들을 가져갔으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프랑스 학자 폴 펠리오가 가져갔다.

 

막고굴이 세상에 알려진 이후, 세계 각지의 학자들은 석굴의 벽화와 문서를 해독, 연구하기 위해 이곳 중국을 다녀갔으며, '둔황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날 정도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감숙성 주천(酒泉)경승구 사막인 명사산 월아천, 근처의 막고굴(莫高窟)에 남아있는 찬란한 불교유적들.  막고굴이란 사막에 있는 높은 굴이란 뜻이다.

 

▲  둔황 막고굴 앞 개천 모습과 백양목 숲   © 박익희 기자

 

굴은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굴이 있는 앞쪽에는 시냇물이 흐른 흔적이 있었고, 물가에는 백양목 숲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생명수인 물의 고마움을 다시 한번 느낀다.

 

물과 생명, 흙과 바람, 공기는 무한재로 무궁무진하게 있는 것으로 알고있지만 사실은 총량불변의 법칙으로 지상의 물은 땅 속으로 스며들고, 하늘로 증발하여 다시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시고 모든 생명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된다. 이제 물이 블루오션으로 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우리는 8개의 굴을 살펴보고 간이박물관인 곳을 들려서 막고굴에 대한 여러 자료와 해설을 다시 듣고 보았다.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에 쓰인 내용을 사진에 담았다. 

 

해설을 담당한 유샨 아가씨와 전망 좋은 곳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나의 가슴에 막고굴에 대한 진한 감명은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  막고굴을 나오며 보니 여러  탑이 보였다.   © 박익희 기자

 

하지만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에 대한 얘기는 귀국 후에 인터넷을 지식백과를 통해 알았다. 막고굴 상점에는 한국의 관광객은 많았으나 한글판 막고굴 안내책자는 없어서 아쉬웠다.

 

우리는 모처럼 박회국 사장이 우리를 위해 가져온 초절임고추와 가죽나무잎 무침을 곁들여 맛있게 점심식사를 했다. 한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식사 후에 약 2시간 버스를 타고 유원역으로 갔다.

 

유원역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서 검색대를 통과해야만 했다. 무표정하고 젊은 공안들에게 심하다 싶을 정도의  물건과 몸을 검색을 당했다. 여태까지 무사했던 짐가방 속의 스위스제 맥가이버 칼도 압수를 당했다. 어쩌랴. 독립을 시도하고 있는 신장위구르 지역이 가까워졌음을 실감했다.

 

박동광 가이드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을 버스 운전기사를 불러서 맥가이버 칼을 맡기는 지혜를 발휘했다. 대단한 순간적인 기지로 재물을 지키는 슬기를 목격했다.

 

▲ 포도밭 모습    © 박익희 기자
▲ 엄청난 규모의 목화밭    © 박익희 기자

 

유원역에서 선선행 고속기차에 몸을 싣고 약 3시간을 달렸다. 끝없이 펼쳐지는 황량한 벌판에 나무를 심고 포도나무와 목화를 심어서 삶에 보탬이 되도록 인간은 생존을 위해 자연을 극복하는 모습에서 나는 인간의 위대함을 생각했다. 

 

나는 피로가 밀려와 잠시동안 눈을 붙이고 졸았다.

 드디어 신선역에 내렸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경도를 기준으로 정한 중국의 단일 표준시간을 적용했다. 중국은 시차가 한국보다 1시간 늦지만 이곳부터는 실제 생활시간은 2시간이 늦다.

 

▲ 선선역 간판 위에  이슬람어로 쓴 문자도 있다.    © 박익희 기자


어느덧 해가 서산을 행해 넘어가고 있었다. ‘해는 지고 갈 길은 멀다’는 일모도원(日暮途遠)이란 사자성어가 생각났다.우리 일행은 선선서유대주점호텔에서 편안한 밤을 보냈다.  오늘 하루도 친구들과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슴에 감사를 드리며 두손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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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2/25 [13:36]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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