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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건 특별기고] 대한민국 근대화백 박수근을 보다
‘독학으로 자신만의 미술세계 세운 한국 대표 화가 ’우뚝‘
 
데스크 기사입력  2020/07/21 [11:41]
▲ 박수근 화가 (1914년 2월 ~1965년 5월)  

“독창적 작품 구축”···삶·예술의 서민화가로서 자리매김

 

화가 박수근에게 삶과 예술은 한마디로 ‘서민화가’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밖에도 ‘국민화가·민중화가’라는 말들이 따라다닌다.

 

박수근은 사후에 더 유명해졌다는 점에서 이중섭과 자주 비교 되지만, 박수근은 독학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하고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이중섭과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며, 노상과 장터 등 가난하고 소박한 일상을 정감있게 표현했다.

 

화가로서의 시작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봄이 오다’가 입선한 1932년으로 볼 수 있다. 1936년 제15회 선전에서 ‘일하는 여인’으로 두 번째 입상을 하는데, 아기를 등에 업고 절구질하는 농촌 아낙네의 모습은 그가 평생 추구한 에술 철학을 그대로 보여 준다.

 

1940년에 결혼을 하고 도청 사회과 서기·미술교사·미군 PX에서 초상화가 등을 거쳐 1953년 국전에서 ‘집’은 특선을, ‘노상에서’는 입선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특유의 소박한 인물과 풍경이 굵고 검은 윤곽선에 황갈색의 색채와 두터운 질감, 명암과 원근이 없는 단순한 형태를 보이며, 박수근의 작품은 외국인 미술 애호가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이는 독특한 조형적 특성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는 이국적이라 할 수 있는 한국적 정취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박수근의 작품은 시대의 풍속이 그대로 담겨 있어 시간이 흐른 후 점차 한국인들에게도 전통적 정취를 불러일으켰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 간 그는 사후에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사랑받는 화가가 됐으며,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 작가 가운데 김환기와 함께 가장 높은 경매가를 기록하고 있다.

 

▲  1960~1964년, 45.5x37.9cm, 캔버스에 유채 ‘할머니와 손자’ [개인소장]   © 권병건 기자

 

2002년에 그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군에 박수근미술관이 개관돼, 그의 대표작 ‘빨래터’, ‘나무와 두 여인’, ‘아기 업은 소녀’ 등을 전시하고 있다.

 

박수근의 ‘할머니와 손자’ 작품은 유화 반세기만에 공개된 작품이며, 1960~1964년 캔버스에 유채 (45.5x37.9cm)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작품에 손자를 안고 있는 할머니의 미소가 정겹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민중화가’ 소박한 모습 통해 한 시대 진솔하게 표현

 

박수근의 작품은 한 시대의 기록으로서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아가 민족의 정서가 향토적 색채로 함축돼 있어 시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박수근의 ‘기름장수‘는 기름병을 담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걸어가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아직 돌에 새겨진 듯한 두터운 재질이 완성되기 전에 그린 초기작이다. 그렇기에 유채의 거친 붓질과 곡선의 윤곽이 살아 있다. 검은색 선으로 윤곽을 잡고 굵은 붓질로 질감을 살렸다.

 

머리가 작고 어깨가 좁은 여인이 기름병이 담긴 바구니를 이고 있어 뒤뚱 거릴듯한데 두 손을 내린 채 걷는 형태에 균형미가 있다. 보통 사람의 소박한 모습을 통해 한 시대를 진솔하게 표현한 ‘기름장수’는 박수근이 특히 좋아한 작품이라고 전해진다.

 

박수근은 나이 50이 다 돼서 10년간 살던 집에서 쫓겨나듯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기막힌 일을 당했다. 이유는 1953년에 구입한 창신동 집이 건물만 박수근의 소유이고 땅은 다른 사람의 소유였으며, 구입당시 부동산 등기를 제대로 살피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결국 국가정책에 따라 도로가 생기면서 박수근의 집은 반 토막이 났다.

 

박수근은 집을 시장에 내놓았지만 대지와 분리된 건물이라는 약점 때문에 그 집은 겨우 70만 원에 팔렸다. 그나마도 땅값 40만 원을 치르고 나니 남은 것은 30만 원뿐이었다. 박수근은 화실이 따로 없이 집의 마루를 화실 삼아 사용하고 있었다.

 

벽 쪽으로 작품을 겹겹이 쌓아두고서 화구를 잔뜩 늘어놓은 채 그림을 그렸는데, 도로가 확장된 탓에 마루까지 없어져 버렸다. 이후 방 안으로 화구를 들여놓고 작업을 하다 보니 온 식구가 화실에서 생활하는 셈이 됐다.

 

그러나 30만 원으로는 창신동에서 같은 규모의 집을 구하기가 도저히 힘들었다. 결국 1963년에 박수근은 창신동보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전농동으로 이사를 갔다.

 

▲   1953년 29.3x16.7cm 하드보드에 유채 기름장수 29.3x16.7cm [현대갤러리 소장]

 

‘할아버지와 손자‘는 집 문제가 폭풍처럼 지나가고 난 후 박수근이 쇠약해져가는 몸으로 엄습하는 절망에 혼신을 다해 완성한 작품이다.

 

▲   1964년 146x97.5cm 캔버스에 유채 할아버지와 손자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박수근의 그림을 좋아하던 마가렛 밀러 여사는 편지를 주고받던 중에 박수근의 딱한 사정을 접했다. 밀러 여사는 약간의 돈과 함께 다음 해에 로스엔젤레스에서 박수근의 개인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박수근에게 전했다. 극도로 쇠약해진 박수근은 미국에서 열릴 개인전을 꿈꾸며 계속 작업하기 위해 애썼다.

 

그렇지만 임시 처방으로 치료한 결과 한꺼번에 밀려든 백내장이며, 신장염·간염으로 말미암아 몸의 고통이 점점 깊어갔다. 무엇보다도 시야가 흐려졌는데 이는 화가에게는 치명상이었으며, 이후 그는 백내장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한쪽 눈을 실명했다.

 

박수근은 타 지역보다 돌이 많은 강원도 산간 지방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어린 시절 돌과의 추억은 박수근의 내면세계의 원형이며, 박수근은 화판이나 종이 위에 캔버스 천을 입힌 후 거기에 흰색·갈색·흑색 물감을 나이프와 붓을 이용해 두껍게 여러 층 쌓아올리고 그 위에 인물을 그렸다.

 

‘할머니와 손자’는 개인 소장품이다. 이 작품의 원작을 보며 설명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작품을 보면 팔의 곡선이 각이 졌음을 알 수 있다. ’할머니와 손자‘는 팔의 곡선이 둥굴며, 다른 작품보다 확연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마애석불 부조를 감상할 때 멀리서 바라보면 오히려 형태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박수근의 ’할머니와 손자‘도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 형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박수근 특유의 화강암 재질감만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박수근은 우리나라의 석탑·석불 같은 데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그 미감을 독특하게 표현했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두꺼운 질감 속에서 벽화처럼 평면화 돼 ‘할아버지와 손자’에는 앞을 향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노인과 아이, 하는 일 없이 앉아 있는 두 남자, 길을 가고 있는 ‘얼마 벌이도 되지 않을 물건을 머리에 이고 가는’ 행상하는 두 여인이 있다.

 

이 그림을 좀 더 눈여겨보면 노인이나 중년의 사내들이 앉아있는 장소와 두 여인이 가고 있는 장소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박수근은 원근법의 단일 시점을 사용하지 않고 입체적인 대상이나 풍경을 평면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마치 모든 대상이 동일한 평면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언뜻 보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남녀유별을 지키듯이 부인은 부인끼리, 남성은 남성끼리 있다. 이렇듯 박수근의 그림에서 남녀가 함께한 모습은 찾아보기 드물며, 이 모습은 유교 사회의 인습이 강하게 남아 있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자연스러운 사회 풍경이었다.

 

▲   1961년, 45.5x38cm 캔버스에 유채, 모자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편으로는 돌에 새겨져 멈추어 있는 듯 그려진 인물들이지만 서로 조근 조근 이야기를 하는 동적인 자세이며,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위해 대화를 나누는 듯 보이는 아저씨들, 이와 대조적으로 일 나가는 어머니들이 힘들지만 건강한 모습, 할머니와 손자의 끈끈한 정을 표현해 희망을 전달한다.

 

박수근은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다채롭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손자의 그림에는 각이진 형태를 띠고 있고, 모자와 할머니와 손자 는 같은 그림의 형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박수근 화백은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가장 즐겨 그린다”고 말했다.

 

▲   1960년, 22x28cm, 하드보드에 유채, 시장의 여인들, [현대갤러리 소장]

 

서민들의 모습과 일상을 꾸밈없이 단순하게 나타내지만, 그들을 향한 측은지심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이는 박수근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예술관은 그의 화법으로 이어져 거친 재질을 바탕으로 단순한선과 무채색을 사용해 일상을 담아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작품 중 하나인 박수근의 그림은 당시만 해도 국내 인사들의 기호에 맞는 화풍은 아니었고 그 독특한 화풍과 황토색 짙은 표현은 외국인들의 시선을 끄는 이방인의  기호품일 뿐이었다.

 

박수근의 작품은 예전에는 국내에서 거의 팔리지 않았다. 1950년대 말, 우리나라 화단은 유럽의 엥포르멜(informel美術) 추상화풍이 집단적으로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다. 

 

박수근의 기법은 당시 어떤 화가도 해내지 못했던 것이었으며, 그러한 표현은 한국 미술 사상 최초의 시도로 매우 낯선 것이었다. 박수근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으나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조용히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는 농부가 농사를 짓듯이 시간을 정해놓고 작업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의 근원을 찾아내는 혜안을 획득해 나갔다.

 

박수근은 “예술은 고양이 눈빛처럼 쉽사리 변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 깊게 한 세계를 깊이 파고드는 것”이라며 “가슴을 울리는 말과 함께 작품은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가슴에 오롯이 살아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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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7/21 [11:41]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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