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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두 인물…정조대왕과 박정희 대통령
화성기적비문(華城記蹟碑文) 및 화성복원기념비(華城復元紀念碑)를 읽고 두 영웅을 새긴다
 
박익희 기자 기사입력  2020/07/03 [23:01]

세계문화유산은 인류가 지키고 간수해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정조대왕의 원대한 계획에 의해 축성한 '화성'을 유네스코는 1997년 12월 그 보편적인 가치를 인정하여 세계유산이 되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폐허가 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남문이 팔달문과 서문은 화서문은 온전한 형태로 남았다. 그래서 수원사람들은 "남문은 남았고, 서문은 서 있다. 하지만 북문은 부서지고 동문은 도망갔다."라는 우스개 말이 전해진다. 

 

역사적 두 인물 정조대왕과 박정희 대통령, 조선 정조대왕은 어떤 생각으로 화성을 축성하고,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은 폐허가 된 수원 화성을 복원한 이유를 짚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원문과 장안공원에 세워진 화성복원기념비를 읽고 새기는 일도 뜻깊은 일이라 생각되어 소개를 한다.[편집자 주] 

 

▲   용연에서 바라본 방화수류정과 동북포루 야경  © 강희갑 사진작가

 

화성기적비문(華城記蹟碑文)

정조13년(1789)에 우리 현륭원(顯隆園)을 수원부(水原府)의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그 읍치를 유천(柳川)으로 옮겼다. 그 다음해 1790년에 원자(元子)가 태어나니 온나라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793년에 임금께서 수원에 거둥하시어 수원부를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킬 것을 명령하여 체모(體貌)를 높였고, 행궁(行宮)을 두어 우러러 의지할 뜻을 나타내었다. 또 수원부에 성을 쌓을 것을 의논하였으니, 원침(園寢)은 한강 남쪽에 있고 영부(營府)는 원(園의 북쪽에 있어서 원침을 막아 지키는 방법으로 이 사업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규모와 제작은 모두 임금의 뜻에서 나왔고, 계획과 기율도 모두 임금의 결단을 따랐으니 유사(有司는 명령을 받들어 가르침을 따른데 불과할 뿐이었다.

 

임금께서 교서(敎書)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사업은 경기도와 호서의 요충지라고만 해서 하는 것이 아니며, 5천병마의 무리가 있다고 해서 하는 것만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선침(仙寢)을 위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행궁을 위한 것이다.

 

마땅히 민심을 즐겁게 하고 민력을 덜게 해주는 것으로 힘써야 할 것이요, 조금이라도 백성들을 괴롭히는데 가까운 일이 있다면 비록 공사가 하루를 못 가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나의 본의는 아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모든 일은 먼저 그 대체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성을 쌓는데 중요한 것은 형편에 따라서 기초를 정하되 둥글거나 모나게 하지 말며 보기에 아름답게 꾸미지도 말고 이로움과 형세에 따라서 하라.

 

공사를 감독 하는데 중요한 것은 운반을 편리하게 해 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옛 사람의 인중기(引重機)와 기중기(起重機)를 사용한 법을 강구해서 거행 하도록 하라. 재물을 모으는 방법은 그 조처하고 계획한 것이 있으니 스스로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경비를 걱정하지 말고 다른 기부금도 받지 말도록 하라. 모양을 꾸미는 방법으로는 위는 처마처럼 하고 아래는 돌층계처럼 하여 지역에 따라서 쌓되 멀리는 중국의 법을 모방하고 가까이는 고상(김종서)이 논한 것을 취하라 하였다.

 

위대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한결 같도다 왕의 마음이여! 여기에서 가히 모든 왕 중에 으뜸가는 효도와 백성들을 자식 같이 여기는 인자함과 만물에 두루 베푸는 지혜를 볼 수 있다.

 

1794년 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 가을에 이르러서 공사를 끝마쳤으니 그 기간이 모두 34개월이었지만 중간에 6개월을 쉬었으므로 실지 공사에 소요된 기간은 겨우 28개월밖에 안 되었다.

 

아아! 3년동안 공사하는 사이에 두루 수많은 화살을 막아낼 성곽을 쌓는데 성공하였으니 신의 도우심이 있었던 것 같으며, 이에 우리 성상의 신묘한 계획과 묘한 운영 방법이 보통의 갑절이나 뛰어 났음을 우러러 볼 수 있겠다.

 

성의 둘레는 무릇 4천6백보(5.74km)이니 도합 12리요. 성의 모양은 가로로 길게 비스듬하여 무르녹은 봄의 버들잎 형상 같으니 그것은 '유천'이란 지명에서 취한 것이다.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한 것은 원묘(園墓)가 화산(花山)에 있으므로 화(花)자와 화(華)자가 서로 통하는데서 취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화(華)땅 사람이 성인(聖人)에게 축원한 뜻도 포함한 것이니 모두 성교(聖敎)를 받들어서 시행한 것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팔달문 야경     © 박익희 기자
▲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 박익희 기자

 

성의 문은 4개가 있으니 북쪽은 장안문(長安門)이요. 남쪽은 팔달문(八達門)이며 동쪽은 창룡문(蒼龍門)이요. 서쪽은 화서문(華西門)인데 장안문과 팔달문은 바로 우리성상이 해마다 선침에 배알(拜謁)하는 연로(輦路)로 한양성과의 거리가 70리이다.

 

산이 둥그스름하게 솟아서 성의 진산(鎭山)이 된 것은 팔달산이다. 팔달산 정상에 장대(將臺)가 있는데 그 위에 올라보면 멀고 가까이에 산봉우리들이 둘러있는 것이 마치 뭇별들이 북극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과 같다.

 

산으로부터 내려와 창룡문을 지나서 다시 산에 올라 서쪽으로 가면 또 장대가 있고 그 나머지로는 공심돈(空心墩) 각건대(角巾臺) 화양루(華陽樓) 포루(鋪樓) 각루(角樓) 암문(暗門) 용도(甬道) 옹성(甕城) 벽성(甓城) 노대(弩臺)등이 있는데 모두 그 지세(地勢)를 따라 쌓은 것이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옛말에 이른바 용두(龍頭)의 위에 있는데 용연(龍淵)이 그 북쪽에 있다. 이것이 성부(城府)의 대략이다. 재물이 80여 만금이나 들었고 인부가 70여만명이나 들었는데 이것은 모두 왕실의 사재에서 나온 것이니 특별히 계획한 것이다. 돈으로 군정(軍丁을 사서 성역에 나가게 하여 번거롭게 징발하지 않았다.

 

또 거중기(擧重機)와 유형거(遊衡車)를 사용한 것은 운반하기에 편리한 제도였기 때문이며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농사짓고 호(壕)를 파서 지키게 한 것은 먼 날을 염려한 꾀였다. 겨울에는 옷을 주고 여름에는 약을 나누어 준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지극함이요, 혹시 흉년을 만나면 부역을 정지하도록 특별히 명령한 것은 깊이 백성을 걱정하신 것이다.

 

아아! 성왕(聖王)의 정치는 쓰기를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릇 시행할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국고를 바탕으로 하고 백성들이 수고로운 부역에 임하나니 국비로 경영하는 것은 바로 나라와 백성이 있어온 이래로 밝고 의로운 성상들이 이미 행하여 왔던 것으로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이다.

 

오직 우리 전하는 지혜가 하늘과 같아서 비용은 쌓아 두었던 재물로 경영하였고 인부는 모두 품삯을 주고서 부려 국용(國用)은 털끝만큼도 허비됨이 없었으며 백성들은 3일의 부역도 면하였다. 때에 알맞게 절제하였고 멀리서 가져오고 가까이에서 이용하여 열리지 않은 지리를 일으켰으며 함락되지 않을 금성탕지(金城湯池)를 만들어 놓았으니, 이는 진실로 삼대의 융성할 적에도 없었던 일이요. 오늘날 처음으로 보는 것이다.

 

하물며 이 사업에 있어서 한 명령이라도 혹시 백성들의 뜻에 거스름이 있을까 염려하고, 한 일이라도 혹시 백성들의 힘을 해침이 있을까 두려워한 것은 진실로 과거에 우리 성상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여 연로의 곡식 싹도 밟지 않으신 것을 본받은 것이니 비록 어리석고 어리석어서 미련하기가 마치 벌레와 같은 저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어찌 그 무궁하신 마음에 감동하여 눈물 흘리지 않겠는가.

 

뭇 장정들이 힘을 합하고 여러 공장(工匠)들이 앞서서 일하여 이 길고 넓은 우뚝한 성을 쌓아 길이 억만년에 천지가 다하도록 선침을 호위하고 행궁을 보호하며 서울의 날개가 되어 엄연히 경기주변의 큰 진(鎭이 되게 하였으니 이것은 한꺼번에 네 가지 아름다움이 갖추어진 것이다. 

 

어찌 위대하지 아니하며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아아! 엄숙한 행궁에 현륭원이 매우 가까이 있어 어진(御眞)을 받들어 사모함을 나타내었으니 이는 진실로 큰 성인의 무궁한 효가 실로 국물만 보아도 모습이 보일 듯한 데서 나온 것이다.

 

상상컨대 백세(百世)의 뒤에도 전하의 효도에 감동하여 전하의 마음을 슬퍼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물며 늙고 천한 신(臣)이 하늘보다 끝이 없는 지우(知遇)를 받았음에 있어서랴! 

 

정조 21년 1797년 정월 일에 대광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원임 규장각제학 치사 봉조하(大匡輔國崇祿大夫 行判中樞府事 原任 奎章閣提學 致仕 奉朝賀) 신(臣) 김종수는 교서를 받들어 짓다. 

 

▲ 각건대라 불리는 동북포루와 성곽, 멀리 장안문이 보인다    © 강희갑 사진작가

 

화성 복원 기념비

나라가 중흥할 때에는 옛일을 살피며 새로운 것을 만든다. 조선왕조 정조 때에 화성을 새로 쌓은일도 그러하였고, 오늘날 이 성을 다시 옛 모습대로 복원하는 일도 그러한 것이다. 화성은 성으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갖추었으며 그 아름다움이 우리나라 성곽의 꽃이라 일컬어진다.

 

▲ 처음에는 '수원성'정화복원비라고 새겼다가 서지학자인 이종학 사학자의 주장으로 '화성' 정화복원비라고 고쳤다.     © 박익희 기자

 

본디 수원은 이곳에서 남쪽으로 이십리인 화산 아래에 자리하여 옛 이름은 물의 고을이란 뜻으로 '옛몰'로 불리었고, 통일신라 이후로 '수성' 또는 '수주'라고 불리다가 수원으로 바뀌었다. 

 

정조는 생부 장현세자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1789년 명당자리를 찾아 양주 배봉산의 현륭원을 화산으로 이장하게 되니 수원의 읍치의 민호를 이곳 팔달산 아래로 옮겨서 수원이 생겼다.

 

옛 수원의 화산은 꽃산이요. 팔달산 아래는 버드내 형국이라 새 수원은 꽃을 뜻하여 화성이라 이름하고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새 읍을 보호하고 서울을 강남에서 튼튼히 지킬 화성의 역사는 1794년 2월 24일부터 시작되어 1796년 9월 10일 준공되었다. 

 

▲ 만년동안  편안하라는 장안문     © 박익희 기자

 

화성은 팔달산을 진산으로 삼고 전체 국면이 동쪽을 향하여 열리니 그 가운데로 큰 내가 흐르고 네 모퉁이가 모두 높아서 그 자연형세가 만세에 의지할 요충됨을 갖추었다. 성의 기초는 돌을 배열하고 흙과 자갈을 여러 겹 다져넣어 빈틈없이 튼튼히 하였다. 높이 20자, 4,600보, 둘레의 네곳에 큰문이 있었으니 북은 장안문, 남은 팔달문,  동은 창룡문, 서는 화서문이다. 이들이 다 옹성을 갖추니 그 견고함은 서울도성을 앞지를만 하였다.

 

암문, 수문, 노대, 공심돈 포루와 성안의 장대, 행궁, 사직단, 방화수류정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어울려 한폭의 그림 같았다. 동서의 두 장대는 성지기를 호령하기에 알맞고 사방의 각루와 포사, 봉돈들이 모두 성을 지키기에 편리하도록 차려져 있었다.

 

▲  복원된 남수문은  폭우가 와도 물이 자연스럽게 빠지도록 설계를 하여 복원했다.   © 박익희 기자

 

성을 쌓을 때 쓰든 공구는 지게에서 거중기에 이르도록 우리나라 고유의 각종 기구가 동원되었으니 일하는 사람들은 적은 힘으로 큰공을 이룰 수가 있었다. 이 성역의 계획은 실학자 류형원과 정약용 등의 경륜을 참작한 우리 전통의 제도와 외국의 장점을 따 정조께서 주략을 내리어 민폐가 없이 인화로 성을 쌓게 하였다.

 

그 자세한 내용은 ‘화성성역의궤’란 책으로 펴내어 오늘에도 그때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상고할 수 있다.

 

화성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옛 모습을 잃었고, 6.25사변 때에도 큰 손상을 입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국방 유적 정화의 일환으로 화성의 복원을 분부하시기에 이르러 문화공보부와 경기도가 힘을 합쳐 화성의 옛 모습을 다시 찾게 되었다. 이는 옛것을 되찾는 일에 머무를 일이 아니요 우리의 새 의지를 나타내는 일이다. 

 

1979년 9월  일

전면 제자 대통령 박정희

비문 최영희 짓고, 김용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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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7/03 [23:01]  최종편집: ⓒ gg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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